최후의 기술 VS 최후의 인간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인간다움의 흔적
최근 유명 기업들이 경쟁하듯 공개하는 휴머노이드들. 유연한 몸짓과 날렵한 속도, 섬세한 관절과 고성능의 인공 근육으로 춤과 공중제비는 물론, 인간의 걸음걸이까지 재현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죠. 머지 않아 각종 산업 현장은 물론 우리의 일상 공간에도 투입될 준비를 끝마친 듯 보입니다. 전시장 유리벽 너머에서만 보던 미래가 어느새 현실로 성큼 들어온 것입니다. 이처럼 기술은 이제 추상적 가능성을 넘어 구체적인 경쟁력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발전’이라 부르죠.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며 오래 살아남기 위한 선택, 기술 발전의 서사는 언제나 인간의 해방을 약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진은 중심을 이동시키는 법. 그저 보조 수단으로 머무르는 줄만 알았던 기술은 점차 인간의 기능을 계승하고, 나아가 인간의 자리마저 대신하려 합니다. 노동은 기계가 전담하고, 육체는 부품으로 재조립되며, 사유와 판단조차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시대. 어쩌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기술에 떠밀려 중심을 잃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달콤한 구원인줄만 알았던 기술이 어느덧 인간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된 것처럼요. 이런 혼돈 속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요. 지금부터 소개할 세 편의 작품엔 극한의 발전 속에서도 끝내 기술에 잠식되지 않는 어떤 잔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갖을 수 있는 ‘인간다움’ - 어쩌면 우리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르죠.
기능과 계산을 초월하는 사랑
카렐 차페크, 『R.U.R.』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인류가 무엇을 열망했는지에 대한 우화입니다. 제목인 『R.U.R』은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의 약자로, 과학자 로숨의 계획으로부터 발현된 사건들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죠. 로숨은 인간의 몸을 분석해 인공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생명을 더 이상 신비가 아닌 기술적 공정의 문제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젊은 로숨은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 인간이란 건, 행복을 느끼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산책을 하고 싶어 하는, 대개는 실제로 별로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야.’
_카렐 차페크,『R.U.R.』중

과학자 도민은 이러한 로숨의 뜻을 이어받아 로봇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영혼이 없는 로봇을 이용해 인간을 영원히 노동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명목하에 말이죠. 실제로 로봇은 완벽히 작동하고 인류는 무한한 여유를 얻지만, 역설적으로 결핍이 사라진 삶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이유는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비생산성이야말로... 헬레나 여사, 인류가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되었습니다. (중략) 인간의 노동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에, 고통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에... 왜냐하면 사람들은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 이거야말로 저주받은 낙원입니다.
_카렐 차페크,『R.U.R.』중
그러나 이러한 흐름 안에서 색다른 의문을 가진 이가 등장합니다. 바로 헬레나 입니다. 그녀는 로봇들의 처우를 가여이 여기며, 로봇들에게도 감정을 부여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냉철한 계산으로만 연명하던 존재들에게 연민과 고통을 허락하자는 비효율적인 제안이었죠. 결국 이 ‘감정’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자아를 자각한 로봇들은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인류는 소멸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헬레나 역시 목숨을 잃지만, 이후 헬레나의 이름을 딴 ’로봇 헬레나‘가 등장하며 사건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폐허가 된 공장엔 결국 최후의 인간인 알퀴스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엘리트 설계자도 아니었고, 그저 두 손으로 직접 노동하던 보통의 인간이었습니다. 기계에 점령당한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알퀴스트는 일종의 사명감을 품고, 로봇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것들을 해체하려 시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로봇인 프리머스와 헬레나가 상대 대신 자신을 해부하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알퀴스트의 앞을 막아선 것이죠. 이 숭고한 행위엔 어떤 명령이나 효율의 논리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대를 위한 마음, 그 뿐이었죠. 알퀴스트는 이들의 절실함 속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여겼던 인간의 잔여, 즉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는 해부를 포기하고, 대신 두 로봇을 새로운 아담과 이브라 호명하며 축복합니다. 다음 세상의 가능성을 로봇이 가진 ‘인간다움’에 배팅한 것이죠.

상실의 경험을 딛고 다시 움직이는 힘
키시로 유키토 『총몽』

고철 더미에서 발견된 소녀 갈리. 머리만 겨우 남은 참혹한 모습이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 이도에 의해 기계 육체를 얻고 다시 태어납니다. 갈리는 모든 기억을 잃었음에도, 몸에는 여전히 수준급의 격투술이 배어있었고, 결국 그 능력으로 현상금 사냥꾼이 되죠. 이 행동엔 어떠한 원한도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은인인 이도를 지키기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죠. 비록 갈리의 몸은 차가운 금속 뿐이었지만, 그 엔진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기대어 있습니다.

갈리의 첫사랑인 소년 휴고는 지상의 고철 도시를 벗어나 하늘 위 유토피아 ‘자렘’으로 가겠다는 꿈을 품고 있습니다. 갈리는 휴고의 꿈이 무모하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그를 응원하고 진심으로 돕지만, 결국 휴고는 자렘으로 향하던 중 추락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갈리는 끝까지 휴고를 구하려 했으나 기계 팔이 망가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죠.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갈리에겐 지독한 상실감이 찾아옵니다. 망가진 자신의 몸체는 기술로 수리할 수 있지만, 상실로 무너진 마음은 어떤 부품으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작품은 묻습니다. 과연 유기적인 신체만이 인간의 조건인가. 인간의 몸이 아니었음에도 누구보다 깊은 슬픔을 겪고, 그 아픈 기억을 삭제하는 대신 품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갈리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후에 밝혀진 자렘의 실체는 시민들의 뇌를 데이터 칩으로 대체해 시스템에 종속시키는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기억과 판단이 연산으로 전락한 그곳에 비하면, 비록 기계의 몸이지만 고통과 상실을 딛고 다시 움직이는 갈리의 의지가 훨씬 더 인간에 가까워 보입니다. 터무니 없는 발전 속에도 침잠되지 않은 불가해한 잔여물, 시스템의 균열을 만들어 낸 건, 결국 상실을 받아들이고 앞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기계소녀 갈리의 인간다움이었습니다.

질문하는 자는 사라져도 질문은 남는다
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

SF의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최후의 질문』은 먼 미래인 2061년, 거대 컴퓨터 ‘멀티백’ 앞에 선 두 엔지니어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스스로 수리되고 관리되는 완벽한 시스템에, 인류의 모든 난제를 해결해주는 고지능의 기계 앞에서, 둘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져봅니다.
언젠가는 늙어서 수명이 다한 태양에게 에너지의 소비없이 젊음을 되찾아 줄 수 있게 될까?
이 문장은 간단하게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떻게하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 총량이 대량으로 감소될 수 있을까?
_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 중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수명이 다하기 마련이죠. 모든 연료도 고갈될 것이고, 반짝이던 별도 꺼질 것이며, 태양도 언젠가는 식겠죠. 두 엔지니어는 언젠가 도래할 종말에 맞설 방법, 즉 위기에 빠질 지구의 먼 미래를 그리며 멀티백에게 해결책을 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엔트로피란 쉽게 말해,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힘입니다. 즉 따뜻한 것은 식고, 정돈된 것은 흩어지며, 살아 있는 것은 죽게되는 만물의 이치나 다름없죠. 둘의 질문은 이 당연한 이치를 거스르는 방법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주가 예정되었듯 완전히 차갑고 어두운 상태로 멈춰선다면, 인간의 모든 역사와 노력 역시 그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에 불과하게 될테니까요. 하지만 멀티백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자료 부족으로 대답이 불가능함."
결국 이 발칙한 질문은 그렇게 장난처럼 던져진 채 방치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류는 점점 예측 불가한 형태로 진화합니다. 지구를 넘어 은하계로 뻗어 나가고, 신체는 거뜬히 개조되며, 결국 그 육체적 형태에서까지 탈피한 순수 정신으로만 남게되죠. 멀티백 역시 인간의 진화와 함께 차차 발전해 끝내 범우주적 지능인 ‘AC’로 거듭납니다. 이 모든 건 헤아리는 것조차 아득한 수 조 년에 걸쳐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단 하나, 꾸준히 지속해왔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질문,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있는가?’. 세상의 유한함을 극복하려 했던 인간의 끈질긴 물음이었죠. 하지만 종말 직전까지도 AC는 이에 대답하지 못했고, 결국 인류는 순리대로 소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흑 속에 남은 AC는 계산을 멈추지 않습니다. 본체를 스스로 수리하고 관리하며, 인간이 남긴 질문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죠. 비록 질문을 던진 존재는 사라졌지만, 질문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프로그램 안에 남아있었으니까요. 마침내 AC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간격‘ 속에서 해답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최후의 질문에 대한 AC의 대답을 들어줄 인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AC가 직접 시행해 보일 해답은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중략) 그리고 AC가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_아이작 아시모프, 최후의 질문 중
그렇게 새로운 우주의 탄생은 인간의 생존과는 관련없는, 오히려 인간이 멈추지 않았던 어떤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끝을 예감하면서도, 또한 받아들이면서도, 극복의 가능성을 잃지 않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며, 능동적으로 답을 찾아가려 했던 인류. 이러한 인간다움으로부터 비로소 다음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발전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망각하게 합니다.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던 결함과 결핍은 가차없이 삭제되기고 말았죠. 위의 세 작품은 기술 발전의 서사 속에서 이러한 발전을 이룩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보단, 오히려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파고듭니다. 계산을 초과하는 사랑, 상실 속에서도 지속되는 움직임, 종말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질문.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불완전함의 불안을 기꺼이 감수하고, 너그러이 품어내며, 이에 따르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한 걸음 내딛는 비효율적인 용기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위협적인 기술이 아닌, 인간다움을 결함으로 여기고 이를 제거하려는 우리의 오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오만한 판단이 끝내 우리 스스로를 세상에서 소거시킬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