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모일 때 생기는 것들
스포츠 응원 속 화합의 감각

아직 쌀쌀했던 3월 초,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쿄 마라톤에 참가했습니다. 몇 킬로미터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숨은 가빠오는데, 문득 낯선 이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하이파이브 한 번, 짧은 응원의 외침 한 마디. 대단한 말이 아니어도, 그 에너지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았습니다.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나를 향해 보내는 진심 어린 응원은,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생경한 순간임과 동시에 ‘함께하고 있다’는 이상한 안도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발현되었을까요?
이런 경험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처럼 대규모 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 수천 명이 같은 색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박자에 맞춰 구호를 외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죠. 낯선 이들과 리듬을 맞추며 내는 목소리 속에서, 우리는 말보다 더 빠른 감정의 연결을 경험하곤 합니다.
스포츠에서 ‘화합’의 장면은 종종 경기장 밖에서, 그리고 여러 감각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 응원의 순간들을 따라가며, 우리가 스포츠를 통해 마주하는 ‘화합’이라는 감각을 다각도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오감으로 쌓이는 응원의 물결
응원은 단순히 '격려'가 아닌, 공통된 감각을 나누는 일입니다. 개인의 감각은 곧 공동의 감각으로 진화하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죠. 이는 '몸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주장한 "몸은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응원을 통해 느끼는 연대감은 언어가 아닌 감각을 통한 이해에서 비롯되죠.
그중에서 가장 우리에게 풍성한 자극을 건네주는 감각은 바로 시각입니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팀마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으로 유니폼을 만들고,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템들을 생산해 내죠. 그렇게 같은 색깔과 무늬를 온몸에 덮고 모인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체가 됩니다. 특히 축구 서포터즈의 경우, 애정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깃발이 휘날리게 되면 관중석 전체가 마치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지 '같은 걸 좋아한다'는 수준을 넘어, 공통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은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각적 동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연대감을 느끼게 만들죠.
한편, 응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바로 목소리인데요. 정해진 구호를 박자에 맞게 외치거나, 불협화음인 것 같으면서도 개개인이 던지는 응원의 목소리는 정서적인 에너지를 충분히 제공합니다. 개인적으로 리버풀의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영국 리버풀 지역 축구팀의 서사와 팀, 선수에 대한 애정을 모두 담아낸 아주 의미 있는 응원이라고 할 수 있죠. 수천, 수만 명의 목소리가 맞닿는 순간 우리는 먼 곳에서 그곳에 존재하지 않아도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25 프리미어리그 우승 확정 후 리버풀 선수단과 팬들의 You'll Never Walk Alone 영상 출처 : Liverpool FC Youtube Channel
결국 응원이란 '화합'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감각적으로 체화하게 만드는 도구이자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우리가 서로를 응원하면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알려주죠.
우리는 무엇을 향해 마음을 모을까
우리가 응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응원을 받는 존재가 '잘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스로와 그 대상이 어떤 정서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지죠. 그리고 그 대상은 단순하게 팀이나 선수가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서사 혹은 어떤 태도나 가치인 경우도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보통 하나의 팀이나 선수를 향해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좋아하는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감독이나 선수의 철학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아니면 단순히 외형적인 이끌림 때문일 수도 있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응원하는 대상은 곧 스스로를 투영하는 또 하나의 표상입니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안드레아 피를로, 이니에스타, 모드리치와 같은 '축구 도사' 이미지를 가진 선수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조기축구를 즐길 때면 그 선수들과 같은 포지션에 서게 되는 경우도 많고, 그런 플레이스타일을 즐겨하기 때문이죠. 단순하게 좋아했던 이유들이 점점 진심어린 응원과 동경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또한, 스포츠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우리 마음이 가닿아 쏠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스포츠맨십'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때로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경기를 이어가는 선수에게 도전, 용기와 같은 가치를 느끼고 응원하기도 하죠. 누군가를 응원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 태도를 지지하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어쩌면 응원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의 태도를 지지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승부를 넘어선 공존과 화합
영상 출처 : 스포츠머그
언젠가 봤던 K리그1 광주FC 이정효 감독의 인터뷰의 일부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원정팬들에게까지 인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분들도 우리나라 축구를 사랑하는 한 분 한 분이기 때문"이라며, "멀리서 경기장에 찾아와주신 팬들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했던 장면인데요. 스포츠라는 격한 경쟁의 장 안에서도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이러한 상호 존중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장면으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라커룸 정리도 인상 깊었습니다. 선수단이 사용한 라커룸은 마치 전문 업체가 청소한 것처럼 말끔히 치워져 있었기 때문인데요. 심지어 감사와 배려의 의미로 종이학을 접고 아랍어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남겨놓았습니다. '일본 문화가 원래 그래'라고 해석하기에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스포츠라는 무대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월드컵이라는 전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과 감사를 표한 것이죠. 스포츠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공동체로서 작은 행위를 통해 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던 순간이었습니다.

도쿄 도심을 달리며 누군가와 손바닥을 맞댄 그 순간, 필자는 그들에게 분명 낯선 사람이었고 그들도 필자의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찰나같은 순간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화합의 감각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화합'이라는 단어를 너무 멀고도 무겁게 느끼곤 합니다. 제도적 합의나 사회적 일치처럼 말이죠. 하지만 스포츠에서의 화합은 훨씬 더 가볍고, 진실합니다. 함께 같은 색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박자에 맞춰 소리치면서, 낯선 이들과 나란히 앉아 똑같은 순간을 경험하는 일. 감각의 연결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마음이 이어지게 되죠. 스포츠는 그렇게, 다시 일상에서 우리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응원하며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손 내미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은 요즘 누구를, 어떤 것을 응원하고 있나요?
그 응원이 당신을 무엇과 연결시키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