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으로 돌아보는 처음의 의미

늘 처음처럼 살고자 했던 어른, 신영복 교수의 대표작 3권

'처음처럼'으로 돌아보는 처음의 의미

찬 바람 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차가워진 공기가 한 해 끝자락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올해도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착잡해지는 마음을 붙잡고 술잔을 기울이다 새삼스럽게 술병 로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처럼’.

이 소주 브랜드 로고의 기원을 돌이켜봅니다. ‘처음처럼’은 故 신영복 교수의 시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고, 로고는 신영복 교수가 직접 쓴 글씨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서민들이 즐기는 대중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며 사용을 허락했고 저작권료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6년 처음 출시된 이 소주가 돌풍을 일으켰던 배경에는 글씨에 담긴 신 교수님의 깊은 가르침과 친근한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초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쩐지 부끄럽다는 감정부터 떠오르는데요. 이럴 때는 가장 현명한 어른이 평생에 걸쳐 돌아본 이야기 뒤에 숨어보고 싶습니다. 20년이라는 옥중 생활, 출소 후에도 ‘사람’을 최우선으로 삼는 철학으로 자신을 갈고닦은 소박한 인생을 사셨던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 뒤에 말이죠.


처음처럼

“산다는 것은 곧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이미지 출처: 돌베개

신영복 선생님은 사람들과 ‘역경을 견디는 자세’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자 하셨습니다. 역경을 견디는 방법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고, 이는 곧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자세에서 다듬어진다고 하면서요. 그 ‘수많은 처음’은 끊임없는 성찰을 기반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며 만들어집니다.

그런 신영복 선생님의 생각을 담은 키워드이자 책 제목인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을 소개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무게 있게 벼려진 생각만큼이나 글씨와 그림도 정성 들여 남기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옥중에 계시던 시절 매달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에는 작은 그림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당국의 검열에 자기 검열까지 거쳐 탄생한 묵직한 엽서들이 이 그림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밝게 나올 수 있었다고 하죠. 그림을 보면 선생님의 소박하고 다감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 중 하나. 이미지 출처: 신영복 아카이브

그간 기행문, 옥중 서신, 강연록 등 여러 명목으로 출간된 글을 엮어 손수 그린 삽화들과 함께 출간한 책이 『처음처럼』입니다. 선생님은 언어의 관념과 경직성이 그림을 통해 좀 더 정감있게 다가갈 수 있길 바라며 이 책을 집필하셨다고 합니다. 독자들이 신영복이라는 지성인의 글을 쉽게 접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탄생한 책이니만큼 처음 신영복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분들께 제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새날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선생님의 마음을 만나보세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이미지 출처: 돌베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선생님이 수감생활 중 쓴 옥중 서간을 모은 대표작입니다.

“그 세월 자체로도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20년 징역살이 동안 땅에 묻은 살이 삭고 삭아 하얗게 빛나는 뼛섬을 꺼내놓듯이 한 젊음이 삭고 녹아내려 키워낸 반짝이는 사색의 기록이 바로 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것은 책의 모습을 띤 무량한 깊이를 지닌 삶의 초상이다.”

1988년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쓴 서평을 책 소개의 첫 머리글로 대신합니다. 이 책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평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1988년 출소하셨습니다. 이 책은 그 20년동안의 옥중 생활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만든 책입니다. 극한 상황에서 ‘처음의 나’, ‘세계의 처음’을 깊이 파고들어 가는 선생님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지급되는 누런 휴지, 그 위에 고친 흔적 하나 없이 수백 번 속으로 교정해 보고 또박또박 적었을 정갈한 글씨와 소박한 삽화들, ‘검열 필’이라는 도장이 찍힌 봉함엽서. 그 이미지에는 어두운 역사의 아픔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미래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차분하게 자신과 세계를 성찰하는 선생님의 모습과 물리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우리 삶의 면면이 대비되어 문득 부끄러워지도 합니다.

감방에서 느낀 공포와 원망으로 시작하는 글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한 시대를 바라보는 깊은 이해의 자세로 점점 확대되어 갑니다. 가장 외로운 시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들이 어떻게 이리도 넉넉할 수 있을까 싶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염없이 무너질 수 있는 품이 필요할 때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담론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이미지 출처: 돌베개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노트를 모아 출간한 책이 『담론』입니다. 대학 강의실에 앉아 평생 기억에 남을 강의를 듣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친근한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출간된 책이라 평생에 걸쳐 농축된 한 지성의 철학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동양고전을 이해하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탐색했던 전작 『강의』에 이어 나온 책인데요. 고전에 관심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철학 사상은 도구이지 사상을 독해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니니까요.

성공회대 교수로 강의하시던 모습. 이미지 출처: 뉴시스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화들을 풀어가며, 독자들이 고전의 현대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동양 고전은 ‘관계’가 핵심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홀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완성된다는 관점이죠. 선생님은 이러한 ‘관계론’을 중심으로 강의를 풀어갑니다. 정답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화하며 새롭게 배우는 태도’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직접 쓰셨던 글과 그림. 이미지 출처: 신영복 아카이브

초심이라는 단어는 ‘지킨다’ 또는 ‘되찾는다’라는 서술어와 붙어있곤 합니다. 그래서 초심을 생각하면 변함없이 순수한 속성,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함을 먼저 떠올리게 되죠. 하지만 『담론』에서의 초심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맥락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태도’에 더욱 가깝습니다. 과거의 마음을 고정해 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황 속에서 다시 배울 수 있는 겸손한 태도로 돌아가는 것 또한 초심인 것입니다. 그러니 초심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도 되겠지요.

정적으로 ‘지킨다’라는 태도에서 ‘갱신하는’ 능동적 태도로 나아가는 것. 초심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베타 버전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 책에는 앞서 소개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다 담지 못했던 글도 담겨 있습니다. 옥중서신 최종 독자가 가족이었던 당시에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고달픈 심경을 적었죠. 신영복 선생님 사상의 정수와 극적인 사건의 뒷이야기를 한 번에 경험해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인생 전환점에서 지표가 될 가르침이 필요할 때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들춰보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사회 변천사를 겪으며 얻어낸 ‘살아있는 지혜’의 현신 같은 분이셔서, 이야기 하나하나가 뿌리 깊은 통찰로 가득했습니다. 그토록 무게 있는 인생철학을 이렇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참 존경스러운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죠.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 처음과 지금을 비교하며 착잡해지기 쉬운 타이밍입니다. 무언가의 중간 혹은 끝에 선 우리에게 ‘처음’이라는 상태는 아득하니 먼 시절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오늘 소개해 드린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는 우리의 처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제안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선생님의 다정한 시선을 통해 우리 각자와 서로의 초심을 소박하게, 함께, 변함없이 살펴주는 따스한 계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