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것이 없어서 곁을 주는 이들이 있다
돌봄의 무게를 응시하는 영화 3편
"곁을 준다 줄 것이 없어서 오늘은 곁을 주고 그저 머문다"
_민왕기, ‘곁’ 부분
*<아무르>, <더 웨일>,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곁’을 필요로 합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고 머물 수는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취약함(vulnerability)’에 집중하며, 이 취약성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 그 자체라고 정의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성장할 수 없는 인간은 타자의 돌봄과 인정을 통해 삶을 구성하며, 이 취약성은 곧 타자와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으로 이어집니다. 서두에 인용한 민왕기 시인의 ‘곁’은 이러한 인간 삶의 조건을 문학적으로 노래한 시이기도 합니다. 건강, 사랑, 가족. 삶의 중요한 축 하나가 무너져내렸을 때, 우리는 타인의 곁이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형태임을 또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혹은 일으켜 세우는 데 실패하고 마는 ‘곁’의 무게를 사려 깊게 포착한 세 편의 영화 <아무르>와 <더 웨일>, <아무도 모른다>를 다시 읽어봅니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 : 끝까지 곁에 머무른다는 것
<아무르>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서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를 지독하게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소방대원들이 집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테이프로 봉인된 안방엔 침대 위의 꽃으로 단장된 한 할머니의 시신이 뉘어져 있습니다. 영화는 결말을 먼저 보여준 뒤,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따라갑니다.
80대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아갑니다. 어느 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안느에게 증세가 시작됩니다. 이후 안느의 몸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뇌졸중으로 인해 반신이 마비되고, 말을 잃어가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조르주는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시설에 보내자고 하지만, 조르주는 거절합니다. 직접 먹이고, 씻기고, 안아서 옮기는 돌봄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갑니다. 그러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고, 조르주 역시 지쳐갑니다. 사랑하는 이가 생을 온통 고통으로 채워가고 있을 때, 그 곁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이마를 짚어주는 것뿐임을 알았을 때, 그는 안느의 고통을 끝내줄 것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영화에서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회상과 응시로 연결된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반부의 시퀀스입니다. 간호사가 찾아와 안느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동안, 침대에 누운 채 낯선 손길에 몸을 맡긴 안느는 어떤 상상에 사로잡힌 듯 멍한 표정을 보입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건강하던 시절의 안느가 아름다운 선율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입니다. 여기까지 관객은 이 회상이 안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고통은 잊은 채, 과거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골똘한 그녀의 표정을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다음 컷은 안느의 피아노 연주를 소파에 앉아 바라보는 조르주의 얼굴로 이어집니다. 조르주는 말없이, 묵묵히 그 연주를 지켜봅니다. 그러나 조르주가 등 뒤에 놓인 플레이어의 전원을 끄자, 선율도 함께 멈춥니다. 조르주는 이후의 정적을 한동안 견디며 앉아 있습니다. 이 시퀀스는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올린 삶의 기억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아무르>는 다시 볼 때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소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부와 조르주의 선택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가 아니라, 두 사람이 어떤 형태로 시간을 보내고 함께하는지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안느가 휠체어에서 소파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지탱할 곳이 되어주는 조르주의 흔들리는 몸을, 안느가 오른팔을 쓸 수 없는 채로 머리맡의 안경을 쓰고 가만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전동 휠체어를 갖게 되자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미소 짓는 두 사람을 보게 됩니다.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또 짐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곁을 지키는 모습을 다시 발견합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 : 곁을 허락하지 못하는 사람
<더 웨일>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찰리와, 그의 곁에서 그를 돌보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찰리는 연인 앨런의 자살 이후 자기 자신을 단죄하듯 몸을 파괴해왔습니다. 272kg의 몸으로 아파트에 갇혀, 온라인 강의와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며 살아갑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며, 주어진 죽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단죄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사라져야, 상처만 안겨준 사랑하는 딸에게 유산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런 찰리가 마지막까지 원하는 건 딸 엘리와의 화해입니다. 찰리는 아내와 딸 대신 강의에서 만난 제자 앨런과 사랑에 빠졌고, 그 선택은 앨런의 죽음 이후로 찰리를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선택은 딸 엘리에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과 반항심을 안겨줍니다. 엘리가 탈선을 멈추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찰리는 딸이 어린 시절 쓴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를 줄줄 외우며, 숨을 거둘 것만 같은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그 에세이를 찾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받고자 하는 것 또한 딸 엘리의 행복입니다. 그녀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고. 그렇게만 된다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유일하게 찰리의 곁을 지키는 건 친구 리즈입니다. 간호사로 일하는 리즈는 줄곧 찰리를 찾아와 혈압을 재고, 밥을 챙기고, 병원에 가자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찰리는 이를 끝까지 거부합니다. 리즈는 허겁지겁 핫도그를 입에 욱여넣던 찰리의 목에 음식이 걸리자 사력을 다해 빼내주면서도, 그에게 치즈를 추가한 샌드위치를 건넵니다. 보행기 대신 휠체어를 가져다 주고, 방문할 때마다 심전도를 체크하며 성의껏 그의 곁을 돌보던 리즈가 가장 상처받는 순간은 찰리에게 모아둔 돈이 꽤 많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돈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물리 치료사도 건강 보험도 구했을 거라며 찰리를 책망합니다.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찰리와 리즈가 근본적으로는 같은 상실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리즈는 앨런의 여동생입니다. 리즈는 찰리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였던 앨런의 죽음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리즈는 앨런이 죽기 전 몇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한 그에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 노력했고, 강 위에 떠오른 시신을 확인한 것도 다름아닌 리즈였습니다. 같은 상실 이후로 누군가는 생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켜낸다는 아이러니함이 영화 속 관계의 양상을 다시 곱씹어보게 합니다.

찰리는 끝끝내 치료를 거부합니다. 울혈성 심부전이 점점 심해져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딸 엘리에게 자신이 외우던 모비딕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 글에는 고전의 권위와 과제의 목적, 성적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내려간 딸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딸이 에세이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찰리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엘리에게로 걸어갑니다. 휠체어에도, 보행기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둔 순간, 그는 마치 하늘로 승천하듯 숨을 거두고, 영화는 찰리가 행복했던 바다에서의 한때를 마지막으로 비추며 끝을 내립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 서로의 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아무도 모른다>는 어른의 '곁'이 없을 때 서로의 곁이 되어주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웃들 몰래 아이 넷을 데리고 이사한 집에서 엄마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에 대해 말합니다. 큰 소리 내지 않기. 밖에 나가지 않기. 베란다에도 나가지 않기. 저녁을 차려 먹는 것도, 엄마가 출근한 사이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입니다. 이후로도 어머니는 줄곧 며칠간 집을 비웁니다. 그 때 아이들의 곁을 지키는 것은 장남 아키라입니다.
아키라는 동생들을 돌봅니다. 밥을 짓고, 편의점에서 장을 보며 돈을 아끼고, 동생들이 밖에 나가지 않도록 단속합니다. 아키라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부모의 부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합니다. 그랬다간 네 아이가 뿔뿔이 흩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곁을 줍니다. 아이들은 취약하지만, 그 취약함을 받아줄 어른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돈은 점점 부족해지고, 집은 쓰레기로 가득해집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생명력은 점점 강해집니다. 수도 공급이 끊기자 공원에 물을 받아 오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합니다.

아키라는 막내 유키의 생일 기념으로 밤에 함께 외출을 감행합니다. 아키라는 하네다 선 전철을 바라보며, 다음에 전철 타고 공항에 비행기 보러 가자고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허락된 세상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까지라는 사실이, 비행기를 타고 먼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은 꿈으로도 상상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관객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곁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여느 때처럼 부러운 듯 운동장을 바라보는 아키라에게 초등학교 감독은 유니폼과 글러브를 주고 시합에 출전시킵니다.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아키라의 얼굴이지만, 집 안에서는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싸늘해진 유키의 몸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뒤늦게 도착한 엄마의 편지엔 돈과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는 성의없는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유키는 그저 창 밖을 궁금해했을 뿐인데, 이야기는 뼈아픈 결말에 닿고 맙니다. 아키라에겐 한나절의 행복한 경험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키의 시신을 캐리어에 담아 공항으로 향합니다. 아키라에게 어른들의 도움과 구원을 바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는 끝내 이 아이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서로의 곁에 머무는 시간을 조용히 응시할 뿐입니다. 카메라는 아이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따라갑니다. 밥 먹고, 놀고, 싸우고, 다시 함께 있는 시간들을. 유키를 공항에 묻어주고 난 뒤로도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받고, 공중전화기에서 동전을 줍고 천진하게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곁이 됩니다. 영화는 멀어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프레임을 멈춥니다.

세상의 모든 곁에 대하여
세 편의 이야기가 갖는 공통점은 타인의 곁을 ‘구원’으로 쉽게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누군가를 곁에 두는 일은 서로를 소진하는 일이고(<아무르>), 끝까지 누군가의 곁을 거부하며 자신의 선택을 관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더 웨일>), 결국 소중한 동생을 지켜내지 못한 아이들은 공항에 동생을 묻어주고 돌아옵니다(<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결말은 동시에 이야기의 다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남겨진 이들은 주어진 생을 또 어떻게든 살아내겠지요. 그럼에도 다른 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또 때로 그의 곁을 필요로 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어떤 곁을 내주며 살아가야 할까요. 늙고, 병들고, 상처받고, 버려진 이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새로운 무엇으로 채우고 또 비워낼까요. 민왕기 시인의 ‘곁’은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고작해야 이 삶이 누군가의 곁을 맴돌다 가는 것일지라도
곁을 준다 줄 것이 없어서 곁을 주고 세상의 모든 곁이 다 그렇다"
_민왕기, ‘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