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물이 빚어낸 숭고한 낭만

물줄기를 따라 만난 부산 로컬 브루어리 3곳

부산의 물이 빚어낸 숭고한 낭만
이미지 출처 : 오시게크래프트

'낭만'과 '일'은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일까요?
대량 생산된 술과 달리, 지역의 재료와 독창적인 철학으로 빚어낸 희소성 있는 술 앞에는 '크래프트(CRAFT)'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본래 '힘'이라는 어원을 품고 있는 이 단어는, 현대에 이르러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기술과 행위를 뜻하게 되었죠.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하고, 억척스러운 연구와 노력이 따르며, 때로는 그 수고를 알아주는 이가 적을지라도 묵묵히 완성도 높은 맛을 찾아가는 여정. 삭막한 세상 속에서 진주를 캐내는 것 같은, '숭고한 낭만'처럼 느껴집니다.

낭만의 도시 부산에서 가장 낭만적인 정신으로 하루를 채워나가는 로컬 브루어리 세 곳을 소개합니다. 오직 부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물 맛'을 통해, 여러분의 봄 여행이 한층 더 짙은 농도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1. 광안리 '꿀꺽하우스' : 바다 곁에서 만나는 막걸리의 현대적 변주

작년 여름, 필자는 전통주에 흠뻑 빠져 한동안 막걸리만 마시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음식과도 페어링이 잘 맞고, 맥주나 와인 못지않게 맛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 무렵, 고향 부산에도 꽤 멋진 전통주 브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부산에 가면 꼭 들를 곳' 리스트에 올려두었습니다. 직접 가보니, 기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광안리에 위치한 '꿀꺽하우스' 이야기입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도

부산과 김해 인근에서 자란 쌀과 재료,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 술을 빚는 꿀꺽하우스는, 그동안 막걸리에 대해 품어온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아주 독특한 우리술을 만드는 곳입니다. 이름에 '하우스'가 붙은 것처럼, 직접 생산한 술을 소개하고 경험할 수 있는 전통주 브루펍(Brew Pub)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청년 농부와 단일 품종 쌀을 계약 재배하고 작은 텃밭도 함께 가꾸며 지역과 계절을 담아내기 위해 꾸준히 애쓰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꿀꺽하우스

꿀꺽하우스의 술들은 맛만큼이나 이름도 독창적입니다. 스피아민트가 들어간 '욕망의 거친 물결', 오렌지향이 확 느껴지는 '혼자가 아닌 나', 대추와 더덕을 메인으로 한 '대추걸렸네'와 '더덕캐냈네'까지. 한글로 된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이름들 덕분에 술을 고르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이미지 출처 : 꿀꺽하우스

그 중에서도 필자가 추천하는 꿀걱주는 '광안밤'과 '달그락'입니다.

(1). '광안밤'
직관적인 이름과 기분 좋은 애플민트 향 덕분에 꿀꺽하우스의 시그니처 술로 자리 잡은 제품입니다. 타 지역이나 해외에서 온 친구에게 "광안리 바다를 담아왔다"는 메시지와 함께 건네면 부산이라는 도시를 새롭고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 되어줄 것입니다.
(2). '달그락'
잔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예쁜 이름처럼, 아름다운 자주빛이 인상적인 술입니다. 쌀, 엘더베리, 코코넛이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초콜릿 향이 풍기며 고소한 맛을 가졌습니다. 요거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만큼 막걸리를 새롭게 경험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분명 만족할 한 잔입니다.
이미지 출처 : 꿀꺽하우스

꿀꺽하우스는 술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광안리의 밤과 어우러지는 공간 역시 특별합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부터 페어링 메뉴, 잔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고른 것이 없습니다.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우리 세대가 '전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해답처럼 느껴집니다.


  • 매장 정보
    부산 수영구 광남로 184-1 2층
    매주 화요일 정기휴무

2.'오시게크래프트' : 방랑하는 양조가의 따뜻한 아지트

부산 동래구에는 '오시게'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온천천을 따라 흐르는 동네의 결을 닮은 듯, 이름 자체에서 묘하게 느긋하고 친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죠. 바로 이 이름을 품고 탄생한 '오시게크래프트'는 온천장을 본점으로, 동래와 시청에 각각 한 지점씩, 총 세 곳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도

이 곳을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집시 양조(Gypsy Brewing)'입니다. 자체 양조장을 보유하는 대신, 다른 양조장과의 협업과 신뢰를 바탕으로 술을 만드는 방식인데요. 고정된 공간 없이 세계를 유랑하던 집시처럼, 관계를 통해 자신만의 레시피와 철학을 구현해 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진심 어린 협력 관계가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오시게가 이야기하는 '관계'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텍사스의 어느 바를 연상케 하는 간판과 우드톤의 독특한 인테리어가 반겨줍니다. 왠지 바깥의 시간과 상관 없이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아지트 같이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넉넉한 좌석과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단체 모임에도 부담이 없고, 프라이빗하게 일행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리도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오시게크래프트

맥주 종류는 물론 식사 메뉴도 다양합니다. 독일식 밀맥주인 오시게 바이젠, 영국식 흑맥주 오시게 포터, 체코식 라거인 오시게 골드, 그리고 시그니처 라인업인 오시게 에일과 오시게 모자이크까지. 필자가 방문했던 날은 아쉽게도 오시게 에일이 솔드아웃이어서, 대신 '오시게 모자이크'와 가장 도수가 높은 '오시게 데빌(6.9%)'을 마셨는데요. 아주 독특하거나 낯선 방향을 추구하기보다,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맛입니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바나나 튀김도 인상적이었는데요, 바나나에 빵가루를 입혀 튀긴 것으로, 마치 수제 바나나킥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파스타, 스테이크 등 든든한 메뉴도 함께 갖추고 있어 안주 걱정 없이 오래 머물기에도 좋습니다. 필자는 아직 마시지 못한 오시게 에일과 포터를 핑계로, 봄이 오면 온천천 산책 후 다시 들려보려 합니다.


  • 매장 정보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천로 11 1층
    휴무일 없음

3.'흐흐흐' : 입가에 번지는 기분 좋은 맥주 소리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안락동에 위치한 'ㅎㅎㅎ(흐흐흐)'입니다. 오시게와 마찬가지로 온천천을 곁에 두고 자리한 이곳은, 자체 양조 맥주는 물론 다른 양조장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즈널 맥주, 그리고 국내외 다양한 수제 맥주를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탭룸 스타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지도

"맥주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급하는 흐흐흐입니다."
흐흐흐의 인사말인데요, 단순히 좋은 맥주를 만드는 것을 넘어, 맥주를 소비하는 문화 자체를 새롭게 설계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소개입니다. 보통의 수제맥주집이 맥주 그 자체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많다면, 흐흐흐는 브랜드를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에 대해 훨씬 더 넓은 시야로 고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흐흐흐의 맥주 정신을 그대로 담은 슬로건 'Beer Makes Me High' 는 이 공간의 분위기를 가장 잘 요약하는 문장이자, 시그니처 크래프트 비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 흐흐흐

협업 맥주 중에서는 '끽비어'와 함께 만들어낸 '포옹'이라는 이름의 흑맥주가 눈길을 끕니다. 코코넛의 부드러운 질감에 달콤한 바닐라, 알싸한 시나몬이 어우러진 사계절 스타우트라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흑맥주를 선호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드는 건 아마 이 이름 때문 인 것 같습니다.

이미지 출처 : 흐흐흐

흐흐흐는 유일하게 필자가 아직 직접 방문하지 못한 곳입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봄, 꼭 한 번 들려 야외 테라스에서 엄마, 혹은 친한 친구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맥주 취향을 찾아가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볼 예정입니다.


  • 매장 정보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천로453번길 14 1층
    휴무일 없음

투박한 말투 속 다정한 진심, 가파른 산복도로 위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야경, 언제든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는 푸른 바다. 부산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한데 뭉뚱그려 '낭만'이라 부르곤 합니다. 부산이 유독 크래프트 브루어리와 잘 어울리는 이유죠. 벚꽃 잎이 흩날리는 4월의 부산은 어디를 가도 아름답지만, 술잔에 담긴 이 도시의 진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경험은 무엇보다 특별합니다. 웨이팅 긴 맛집 투어에 조금 지쳤다면, 부산의 물맛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로컬 브루어리로 발길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요? 부산의 낭만을 가득 채운 술잔과 함께 숨겨진 아지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려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