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들려주는 본 이베어의 음악

계절처럼 잔잔히 스며드는 소리

숲이 들려주는 본 이베어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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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은 특정 계절과 함께 떠오릅니다. 꽃내음이 퍼진 길거리, 뙤약볕과 바닷바람, 낙엽을 밟는 소리와 눈 덮인 풍경이 연상되는 음악이 있죠. ‘본 이베어(Bon Iver)’의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어렴풋이 계절의 모습이 그려지는데요. 그의 음악은 매번 특정한 장소와 시간으로 감상자를 안내합니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울림이 있는 음악이죠.

고향의 작은 숲속에서 곡을 쓰던 본 이베어는 점차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 칸예 웨스트 등 유명한 뮤지션과 함께 작업을 하고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했죠. 하지만 그의 뿌리는 여전히 고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직 작은 숲속에 머무르며 자연을 닮은 음악을 만드는데요. 앨범마다 색다른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고유의 매력을 잃지 않는 아티스트 '본 이베어'를 소개합니다.


오두막에서 탄생한 조용한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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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함께 했던 밴드가 해체되고 단핵증까지 앓게 된 저스틴 버논은 자신의 고향 위스콘신의 깊은 숲속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혼란스러웠던 일상에서 벗어나 대자연 속 칩거를 선택한 그는 음악 장비를 챙겨 길고 긴 겨울잠 같은 시기를 보내죠. 그곳에는 넉넉한 공간과 고요함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는 세 달 동안 오두막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장작을 패고 먹을 것을 구하며 단순한 생활을 이어갔죠. 그러던 어느 날 먹이를 찾던 곰 한 마리가 오두막 문 앞까지 찾아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속옷 차림으로 소리를 지르며 곰을 쫓아내고 스튜를 지켜야 했죠. 그 와중에도 저스틴 버논은 하루 12시간씩 녹음과 작업을 이어갔고, 때때로 트랙터를 타고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거나 새벽녘에 해 뜨는 풍경을 바라보며 심신을 달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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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년간 그를 짓눌렀던 개인적인 상처와 상실, 후회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자연 속에서 희석되었고, 마침내 음악이라는 형태로 승화되었습니다. 고립 속에서 손수 완성한 작업물 [For Emma, Forever Ago]는 저스틴 버논이 ‘본 이베어(Bon Iver)’라는 이름으로 만든 데뷔앨범인데요. 총 9개의 트랙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평단과 팬들로부터 눈부신 데뷔작이라는 호평을 얻습니다. 세계적인 음악 매거진 ‘롤링스톤’의 표현처럼 본 이베어의 데뷔 앨범은 ‘조용한 경이로움’을 선사했죠. 어쿠스틱 기타와 팔세토 창법의 보컬, 가끔 등장하는 베이스와 드럼으로 최소한의 구성, 그리고 노래에 녹아든 우연한 잡음들은 모두 낡은 오두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앨범의 수록곡 ‘Skinny Love’는 훗날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버디(Birdy)’가 리메이크하며 국내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동영상 출처 : Bon Iver


광활한 풍경을 담아내기 위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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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버논은 미니멀했던 본 이베어의 사운드를 확장하기 위해 밴드로 구성을 전환합니다. 밴드로서 시도하는 첫 번째 앨범 [Bon Iver, Bon Iver]는 확실히 풍성해진 사운드가 돋보이죠. 트럼펫, 색소폰, 신시사이저 등을 사용한 음악은 안개처럼 퍼지고, 무언가 부유하는 듯이 폭 넓은 사운드 스케이프를 만들어 냅니다. 거대한 풍경을 메우는 울림처럼 말이죠. 호주의 도시 퍼스의 광활한 풍경을 연상시키는 ‘Perth’, 미국 미네소타의 풍경을 그린 ‘Minnesota, WI’,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름을 담은 ‘Lisbon, OH’. 이 앨범의 각 트랙을 이어보면 마치 음악으로 그린 지도처럼 느껴지는데요. 실제 장소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거나, 때로는 내면의 공간이나 고립감을 장소에 빗대어 음악으로 표현한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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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몰아치는 크리스마스 날, 조용한 밤거리를 걷던 저스틴 버논은 도로 위의 얼음이 반짝이는 순간을 목격합니다. 그 순간 자신의 삶이 자연 앞에선 그저 작은 파편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죠. 이 체험은 ‘Holocene’라는 노래로 이어집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는 작은 소년과 광활한 자연 풍경이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인간 개인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죠. 이 곡의 제목은 마지막 빙하기 이후 인류 문명이 꽃피운 지질학적 시기를 의미합니다.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노래하는 본 이베어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출처 : Bon Iver


뿌리와 터전을 기반으로 확장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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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버논의 음악에는 항상 ‘위스콘신’이라는 뿌리가 내려져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고향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왔죠. 이러한 움직임은 음반 작업 외에 다양한 접근을 통해 지역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는 위스콘신 지역 내 노숙인 쉼터와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는 등 여러 지역 사회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요. 지역 커뮤니티를 향한 나눔과 헌신을 통해, 음악 너머의 방식으로도 고향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저스틴 버논은 2015년, 위스콘신 오클레어 지역에서 ‘Eaux Claires’라는 음악 예술 페스티벌을 직접 기획하고 개최했습니다. 이는 지역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동체의 장이었는데요. 자연 속 페스티벌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숲과 강이 흐르는 자연 속에서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죠. 이처럼 저스틴 버논은 대규모 월드 투어나 상업적인 성공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이 자란 숲과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본 이베어의 음악 활동 역시 언제나 자연과 사람, 장소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요.


숲의 시선을 통해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이미지 출처 : Bon Iver

2024년 10월의 어느 날, 저스틴 버논은 위스콘신 숲속에 트레일 캠을 설치합니다. 24시간 내내 숲 한 가운데를 응시하는 화면은 본 이베어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라이브로 송출되고 있는데요. 이 프레임 안에서는 나무가 쓰러지기도, 첫눈이 내리기도 하며 현재까지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계절이 바뀌어도 이어지고 있는 이 영상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In Such A Small Time Frame’인데요. 인간에게는 낮과 밤이 수차례 반복되는 긴 시간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관점에서는 찰나의 순간일 수 있죠.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스케일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만듭니다.

이미지 출처 : Bandcamp

전 세계 어디서든 비밀스러운 숲속의 시선을 통해 계절의 흐름을 지켜보던 팬들은 작은 이벤트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본 이베어가 트레일 캠을 통해 신곡 ‘If Only I Could Wait’와 ‘Walk Home’을 공개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4월 11일, 본 이베어는 위의 두 곡을 포함한 정규 앨범 [SABLE, fABLE]을 발매했습니다. 고향 위스콘신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이 앨범은 흘러가는 시간에서 포착한 풍경과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는데요. 숲의 중심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건네는 본 이베어. 트레일 캠을 통해 숲을 응시하면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나뭇가지의 사소한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듯, 본 이베어의 음악을 듣다 보면 시간과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동영상 출처 : Bon Iver


숲속의 외딴 오두막에서 시작된 음악이 광활한 풍경만큼이나 확장되었다가, 다시 고요한 숲으로 돌아왔습니다. 본 이베어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치열했던 삶도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지는데요. 고정된 카메라로 나무가 흔들리는 걸 바라보듯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밖에 없듯이 말이죠. 괜한 근심과 걱정을 잠시 미뤄두고 본 이베어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사계절처럼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의 음악이지만 자연을 닮아 천천히 여러분의 플레이리스트에 스며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