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역성의 수락: 상처를 ‘고치지 않고’ 사는 법

살아가는 것이 곧 성숙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들

비가역성의 수락: 상처를 ‘고치지 않고’ 사는 법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문제 해결과 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서사의 중심이던 전통을 떠나, 요즘 영화는 수동적인 인물을 정면에 세웁니다. 지금의 나·타인·미래 사이에서 반응 대신 응답에 가까운 대응을 하며 모호한 시간을 버티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반응은 ‘어떤 자극에 따라 즉각적으로 몸에서 이는 현상성’이라면 응답은 ‘자신 앞에 던져진 상황 속 물음에 답하려는 신중한 행동’이 부각된달까요. 그만큼 응답을 하기 위해서는 견딤의 시간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어찌보면 소극적이지만, 이 견딤의 미학이야말로 성숙의 한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반응 대신 응답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기꺼이 감당하는 이야기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상처 치유가 아니라 상처를 품고 기꺼이 살아가는 성숙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구원 대신 감당, 거리를 조절하는 돌봄

이미지 출처: IMDb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는 죄책과 트라우마를 ‘완치할 수 없음’으로 인정하며 살아갈 거리를 조절합니다. 그는 불시에 형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느닷없이 미성년 조카의 법정 후견인이 되는 제안을 받습니다. 하지만 선뜻 응할 수 없습니다. 리가 겪은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현실과 조카의 존재가 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물론 도피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는 시간 속에 잠깁니다. 그리고 가능한 범위의 돌봄, 다시 말해 일정한 거리에서의 돌봄을 선택합니다. 영화는 리의 결정을 강변하지 않습니다. 현재에 사고처럼 끼어드는 플래시백이 시간을 ‘치유의 과정’이 아니라 ‘증언의 자리’로 바꾸고, 절제된 음악이 과잉의 감정선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로 인해 관객 역시 리의 상처가 완치될 수 없음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보다, 또 같은 상처를 공유하게 된 조카의 구원보다 감당을 택합니다.

때로는 일상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힘에서도 성숙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조용히 설득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살아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말

이미지 출처: IMDb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각자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두사람이 우연한 동행을 하면서 자신을 직시하게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외면한 채 지내다 갑작스러운 상실을 맞이하고 초연히 자신의 일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건에도 건조하기만 한 그는 연출을 맡은 연극제 현장에서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납니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어머니를 잃은 여자는 한없이 위태로운 시간을 지나왔지만 동요없이 태연해보이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차 안에서의 상호작용은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 소리와 대사가 전부. 늘 침묵하고 있는 미사키는 그저 기다립니다. 이는 차 바깥을 벗어나도 마찬가집니다. 동료 배우들과의 리허설에서 이어지는 반복과 지연은 어떤 시간 속에 갇혀버린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그런데 서로 우회하는 인내는 고통을 덮어 없애지 않고, 함께 운반하는 관계로 익어가도록 하네요. 머뭇거림의 시간을 서둘러 건너뛰지 않고 말이 도착할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겠죠. 말도 대사, 대화보다 침묵이나 비언어적 수단들로 전해지고 공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극중극에서 수화로 전해지는 메시지는 곧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하는 성숙인 듯하네요.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문라이트>, 2017

멈췄던 성장의 자리로

이미지 출처: IMDb

리틀-샤이론-블랙으로 성장하는 ‘한 소년’은 폭력과 낙인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압니다. 정체성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환경을 감내할 뿐이던 리틀은 끝내 발산하는 에너지를 터뜨리며 샤이론이라는 이름을 되찾으려 항변하지만 이내 블랙이라는 갑옷을 입고 버티게 됩니다.

그리고 버티는 운명 끝에 그가 택한 것은 복수나 망각이 아니라, 재회와 자기 인정. 오래 지속되었던 침묵과 멈춤의 시간은 미해결이지만, 그는 상처가 있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타자에게 다가갑니다. 특히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평생 지워지지 않았던 가장 내밀한 기억을 왜곡하지도, 전시하지도 않고, 그저 타인의 옆에 앉아 덤덤히 되새겨볼 뿐입니다. 그러자 청년 속에 웅크리고 있던, ‘푸른빛으로 빛나는 소년’을 마주하고 그는 다시 성장할 기회를 얻네요.

성숙은 성장이 멈췄던 자리를 차분히 되찾아 다시 앉아보는 태도처럼 여겨집니다. 성숙의 방향이 앞이 아닌 뒤로 회귀해도 괜찮다는 게 아닐까요.


세 편의 영화가 말하는 성숙은 공통적으로 행동을 유예하고 감당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이뤄집니다. 되돌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도, 살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는 이야기. 흥미로운 점은 세 작품에서 모두 차 안에서의 장면에 무게감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차를 빼고는 말할 수 없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말할 것도 없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문라이트> 역시 곁을 주는 이가 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장면이 돋보이는데요. 밀폐된 나의 세계 안에 틈입하는 이, 그리고 함께 바깥의 환경에 적당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나아가는 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스크린 밖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거창한 결의가 아닙니다. 하루치의 감당법이겠죠.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며, 그 지속을 설계하는 일이 우리를 조금 더 자라게 합니다. 상처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사는 기술을 떠올려보세요. 이런 하루가 쌓일 때, 우리 각자의 엔딩도 조용히 바뀔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