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디자인이 자연을 품는 방법
자연을 포섭하는 디자인의 다양한 경로

2022년 공개된 스위스의 새로운 여권 디자인이 최근 SNS에서 화제 된 바 있죠.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장대한 알프스 전경과 강인한 십자가의 이미지는 국가와 국민의 가장 중대한 공문서 중 하나인 여권에 고스란히 녹아듭니다. 산맥, 계곡, 호수 등 국가의 자연을 아름답게 담으면서도, 자외선을 비추면 보이는 또 다른 모습에서 여권에 필수적인 보안 기술을 엿볼 수 있죠. 제네바에 자리한 디자인 스튜디오 RETINAA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본질인 '자연'을 여권에 담아, 모든 국민이 자신이 정체성을 인지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완성했습니다.


스위스 여권 디자인 | 이미지 출처 : RETINAA 공식 홈페이지
이처럼 한 국가, 기업,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는 자연과 함께 완성되기도 합니다. 자연에서 나온 재료를 사용하는 F&B는 물론, 패션, 뷰티, 스포츠, IT 등 자연과 가깝고 먼 분야에서 자연을 토대로 브랜드와 제품의 정체성을 드러내죠. 이번 아티클에서는 최근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가 담당한, 국내 브랜드와 제품에서 자연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사례를 담아봅니다.
CFC - 백세주 : 한국의 시선으로 담아낸 자연과 유산


백세주 리브랜딩 | 이미지 출처 : CFC 공식 홈페이지
이미 망가진 판을 뒤집는 것, 혹은 어떠한 기반 없이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이미 잘 다져진 과거를 뒤로하고 변화를 택하는 것이죠. ‘백세주’는 2020년 개편에 이어 4년 만에 전격 리브랜딩을 택했습니다. 32년간 이어진 백세주의 이미지를 포용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시간을 기대하며 ‘백 년을 잇는 향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전통 청주의 정체성을 뒤엎는 과제는 마켓 컬리, 당근 등의 브랜드 디자인을 제작한 CFC가 맡았습니다. CFC는 SM 엔터테인먼트, 예스24, 칠성사이다 등 브랜드의 새 출발을 여럿 담당한 만큼, 백세주의 도전적인 변화를 잘 담아낼 적격자였죠. 2024년 백세주의 리브랜딩은 잔나비의 최정훈이 앰버서더를 맡고 <아기공룡 둘리> 속 고길동의 서사를 담아낸 감동적인 광고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리브랜딩을 이끌어간 핵심은 단연 CFC가 구성한 브랜드 정체성과 디자인에 있습니다.

CFC는 국순당의 대표로부터 “한식 주점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모두 잘 어울리는 술”로서 리브랜딩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백세주는 전통 청주라는 정체성과 32년간 쌓아 올린 신뢰도로 대중 널리에게 사랑받은 제품이죠. 하지만 동시에 이런 강점은 제품이 젊은 층에게 외면 받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CFC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병 모양과 ‘백세주’라는 이름을 제외한 모든 걸 변화의 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땅에서 나는 재료’를 담는 ‘흙’의 모티프이자 주질을 개선하기 위해 오돌토돌한 질감의 암갈색 병을 선택한 방식이 대표적이죠. 깊이 어두워진 색상은 제품의 중후한 인상을 만들면서도, 특유의 거친 표면과 백세주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땅으로부터 만들어진 술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백세주 라벨 속 ‘百’ 디자인 | 이미지 출처 : CFC 공식 홈페이지
새롭게 탈바꿈한 백세주 패키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라벨 속 ‘百백’이라는 타이포그래피죠. 민속화를 삽입했던 구 라벨 대신, 미려하고 큼지막한 한자를 라벨 가득 덮었습니다. 우리나라 단색화에서 영감을 받은 백세주의 새로운 라벨 속 타이포는 먹의 농담과 평면을 가득 채우는 단색화의 미를 한껏 부각하며, 마치 엄중한 산의 이미지를 연상시키죠. 이에 더해 직선의 가느다란 한글 타이포 로고가 묵직한 한자와 어우러져 라벨 안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짙은 갈색 병이 두고두고 눈이 가는 깊은 분위기를 만든다면, 미색 라벨 속 묵직한 로고는 매대에서 백세주를 마주한 소비자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강렬하죠.
백세주 리브랜딩 프로젝트는 전통 술과 자연, 과거와 미래를 한국 고유의 감각으로 담아내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KOREA DESIGN AWARD 2024 커뮤니케이션 부문 위너로 선정되었습니다. CFC는 백세주에 담긴 오랜 유산과 고정된 이미지를 뒤집으면서도, 동시에 기업과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감각적으로 채우는 신공을 선보였습니다. 서사와 실용성, 깊은 의미와 뛰어난 감각이 고루 담길 수 있다면 브랜드와 소비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리브랜딩이 구현될 수 있겠죠.

백세주 KDA 2024 수상 아티클

CFC 백세주 리브랜딩 스토리
북극섬 외 - 전기가오리 : 귀여운 가오리와 함께 깊은 철학의 바다를 헤엄치기.

도파민과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공부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식은 없을 테죠. 하지만 깊은 이해도와 너른 사전 지식을 요구하는 분야를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장 나와 같이 그 바다에 뛰어들 사람을 구하는 것조차 힘들 겁니다. 철학은 그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죠. 수천 년 역사에 걸친 방대한 자료와 각각의 주장을 파훼하며 쌓아 올린 지식의 상아탑은 물론,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단어와 철학자가 추상적 개념을 담은 철학서는 들여다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는 다르게, 운영자 신우승이 철학 공부의 어려움을 느껴 만든 공부 모임에서 출발한 전기가오리는 지금에 이르러 수많은 철학 도서와 자료 번역, 교육, 모임 운영, 철학도를 후원하기까지 하는 전방위적 학문 공동체로 거듭났습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 29 생물종’ | 이미지 출처 : 진달래 & 박우혁 인스타그램 (좌) / 「장애와 손상의 구별을 중심으로 본 장애의 모델들:... 」 | 이미지 출처 : 박채희 인스타그램 (우)
전기가오리는 플라톤의 <메논>에서 따온 이름으로, 오랜 문답 끝에 말문을 잃은 메논이 소크라테스를 전기가오리에 빗댄 일화에서 가져왔습니다. 신우승 씨의 1인 운영이란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전기가오리는 주기적으로 다양하고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 아래 철학서,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제공하며 ‘철학 구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죠. 그리고 전기가오리는 그 훌륭한 체계만큼이나 실험적이고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높은 수준의 번역, 논문 중심의 기획’과 함께 ‘아름다운 디자인’을 주요한 목표로 꼽을 만큼, 전기가오리가 제작하는 자료들은 그 판형과 색상, 질감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각을 뽐냅니다. 특히 전기가오리의 목적 및 방향성에 공감한 6699press, 프랙티스, 신신 등 유명 디자이너와 스튜디오가 그들의 자료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죠.


전기가오리 ‘보르헤스라는 우물’ 시리즈 | 이미지 출처 : 북극섬
그리고 전기가오리의 로고를 제작한 북극섬(김재하)의 디자인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쨍한 초록색과 파란색을 조합한 아이덴티티 로고는 ‘철학 학문 공동체’라는 진중한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는 전기가오리의 독특한 행보를 연상케하죠. 무엇보다 ‘가오리’라는 핵심 캐릭터는 깊고도 넓은 철학이란 학문의 이미지를 바다의 그것으로 연결합니다. 홈페이지를 부유하는 귀여운 모습의 가오리와 해파리 캐릭터는 전기가오리와 함께하는 구성원들이 철학의 바다를 방황하지 않도록 돕는 길잡이처럼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이렇게 전기가오리는 철학을 둘러싼 의문을, 예컨대 어렵고, 복잡하며, 진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이미지를 디자인을 경유하며 무너뜨립니다. 한명의 운영자가 구성원의 정기 후원을 기반 삼아 운영하는 학문 공동체가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데는, 훌륭한 자료 제작과 시스템 구축, 뚜렷한 비전이 아주 중요했을 테죠.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들의 목적과 이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타인에게 선보일 수 있는 멋진 디자인이 큰 비중을 짊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전기가오리 홈페이지

전기가오리 인터뷰 기사
ORKR - On X PAF Seoul Trail : 러닝과 패션, 서울을 가로지르며.


이미지 출처 : PAF 공실 홈페이지
K-Pop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도, 게임 산업도 훌륭하지만, 202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많은 패션 브랜드가 해외 시장에 진출하고 있죠. POST ARCHIVE FACTION(PAF)은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브랜드입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임동준과 디자인 및 생산 총괄 책임자 정수교가 2018년 설립한 브랜드는 가장 실험적인 디자인의 ‘Left’ 부터 가장 실용적인 ‘Right’,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Center’ 제품군까지 ‘실험과 실용’이란 대비되는 요소를 브랜드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PAF의 제품은 독특한 절개, 해체를 활용한 디자인과 기능성을 부각하는 소재, 실루엣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나아가 2021년 LVMH Prize에 세미 파이널리스트로 이름을 올리고, 버질 아블로가 작고하기 전 오프화이트의 (EQUIPMENT™) 라인을 전담하는 콜라보레이션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새로운 컬렉션과 연계 전시를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진행하며 브랜드의 활동 반경을 넓히기도 했고요.


POST ARCHIVE FACTION X On | 이미지 출처 : PAF 공식 인스타그램 @postarchivefaction
PAF의 다채로운 활약 중에서도 최근 스위스의 러닝 브랜드 온 러닝On과 함께한 콜라보레이션은 패션 시장과 러닝 등 스포츠 시장 양쪽에서 많은 이목과 호평을 이끌어냈습니다. 러닝의 유행과 함께 부상하던 On이 PAF를 협력 대상으로 선택한 것도 화제였지만, On의 특별한 기술인 클라우드 폼을 적용한 신발은 기능과 디자인 모두에서 강점을 살리며 높은 리셀가를 기록했죠. ‘도심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영감으로 한 그들의 협업은 국내외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고, 파리에서 오픈한 기간 한정 쇼룸 또한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2023년 전개한 첫 번째 협업의 훌륭한 성과에 이어 2025년 두 번째 캠페인 또한 많은 관심 속에 발매되어 우리나라 패션 씬의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서울 트레일(좌), 디스턴스 셰이크 런(우) | 이미지 출처 : PAF 공식 인스타그램 @postarchivefaction
기술력에 진심인 On과 브랜드 커뮤니티 형성에 집중하는 PAF는 매번 발매와 함께 사람들을 초대해 제품을 착용하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첫 컬렉션에는 서울 도심 6km를 달리는 '서울 런'을, 가장 최근에는 도심 속 트레일을 즐기는 '서울 트레일' 및 러닝 전문 편집샵 DISTANCE와 함께 '셰이크 런'을 진행했는데요. 그 중 최근 두 이벤트의 그래픽과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롯데 월드타워 서울스카이, TEO 등의 브랜드 디자인을 담당한 ORKR이 제작했습니다.
서울 트레일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에는 On, PAF의 로고와 함께 한국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산의 모습이 조화롭게 담겨 있죠. 또 '마라톤 전날 몸을 풀기 위해 수행하는 가벼운 달리기'를 뜻하는 '셰이크 아웃 런' 행사에 서로 다른 국가의 세 브랜드가 함께한 만큼, 선으로 그린 태극무늬와 각 브랜드가 위치한 도시를 병치해 한국이라는 장소와 브랜드 간의 조화를 표현했습니다. 최근 다방면에서 국내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글로벌 시장에서 협업하고 싶은 대상으로 거듭나고 있죠. 그렇기에 단지 K라는 접두사로 모든 것을 뭉뚱그리는 대신 한국 전통의 매력과 고유한 자연을 조화롭게 표현한 ORKR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훌륭한 선례로 남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연’이란 키워드를 편협하고 고루하게 바라봅니다. 자연은 푸르고 아름다워야 하며, 더구나 한국의 자연을 그릴 때는 단청이나 원색 같은 요소를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위의 세 사례는 어땠나요? CFC와 ORKR은 각각 단색화와 수묵화를 활용해 우리나라의 자연을 담았습니다. 또 백세주는 병의 물성을, PAF와 해외 브랜드의 콜라보레이션은 서울이란 도시를 중심으로 자연과의 연결을 확장시켰죠. 북극성이 디자인한 전기가오리는 누구나 어려움을 느낄 법한 철학의 깊이를 자유롭게 부유하는 가오리와 해파리의 귀여운 모습으로 치환했고요.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자연은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멀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연은 브랜드나 제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혹은 그것을 선보이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죠. 다만 자연이 갖는 너른 범용성과 오랜 시간 수많은 곳에서 활용된 사례로 인해, 그것을 새롭고 독특하게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게 됩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고 그리는 데 다양한 관점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은 그 모든 시선과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지니는 유일한 주체가 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