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기 위한 읽기
지금의 존재론을 위한 세 권의 책
지금 어디에서 이 글을 읽고 있나요? 방에 있나요, 아니면 일터나 대중교통, 또는 카페에 있나요? 어느 곳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우리는 ‘있을’ 거예요. 다만 평소에 있다는 느낌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가 있다는 자연스러운 사실이 조금 낯설 수도 있습니다. 항상 되는 중이지만 그렇기에 모르게 되는 ‘있기’. 오늘은 우리의 있기에 관해 더 생각하게 해줄 책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있다는 말은 대체로 다음의 경우에 사용됩니다. 3번 출구에 있어(위치), 볼펜 여기 있어(유무), 드라마 보고 있어(상태). 평소에 흔하게 사용하는 말들이죠. 그런데 이렇게 자주 말하면서도 우리는 있기를 의식하기 어렵고, 있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감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있기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지금 있는 공간을 만든 노동과 공간의 재료, 재료의 가공 과정, 원료의 출처와 역사를 각각 추적해 지도나 연표를 작성한다고 상상해볼까요. 이 글을 읽는 시간을 갖게 된 맥락이나, 지금까지의 생장 과정을 회고해보는 것도 좋고요. 우리는 매분 매초 주위 환경, 관계와 상호작용하고, 우리의 있기 조건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조건이 맞지 않으면 지구에 있을 수 없고, 국적이나 자본이 없으면 특정 지역에 있을 수 없듯이 말이죠.
있기란 이토록 의존적으로만 가능한 까다로운 일입니다. 따라서 있기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우리를 둘러싼 조건과 관계들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 습득에 그치지 않고 많은 것과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의 존재 방식을 다르게 보는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죠. 아래의 세 권을 통해, 우리의 있기에 관해 사유하는 읽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따로 또 같이 있기 위해
《한편》 19호 ‘혼자’

매 호 하나의 주제로 만들어지는 인문잡지 《한편》의 19호 주제는 ‘혼자’입니다. 고립과는 다른 상태로서의 혼자를 탐구하는 ‘혼자’는 “혼자였다 타인과 연결되었다가 또다시 혼자가 되기도 하는” 일들을 거치며 변화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발화의 당사자성을 두고 고민하며 평등한 관계와 혼자에 대한 욕망 사이의 긴장에 관해 쓰는 하은빈의 글로 시작해, 더 나은 돌봄을 상상하기 위해 친밀성과 생존의 결탁을 끊을 것을 제안하는 진송의 글, 대화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대화법을 학습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침묵과 여백을 통한 신중과 절제를 희망으로 제시하는 박성우의 글 등등, 초연결시대에 무수한 관계 속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조건들을 짚고 있어요.
혼자는 관계에서의 단절이나 거리 두기를 통해 성립한다고 오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홍성훈의 글의 제목인 「나는 나를 나눌 수 있을까?」가 암시하듯 나조차 나를 분리할 수 없는 존재는 연결의 강도가 달라질 뿐 타자로부터 완전히 고립될 수 없습니다. 임시적인 있기의 한 양상으로서 잠시 혼자인 것이죠. 서문에서 말하듯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런 와중에 “혼자인 이들이 잠깐 마주치는 만남”이 됩니다. 우리가 잠시 혼자일 때 읽기가 우리를 이어준다는 상상은 공생에 대한 묘한 낙관을 갖게 합니다. 충분히 혼자 있으면서도 충분히 함께 있기 위해 ‘혼자’의 고민들에 보조를 맞춰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돌보고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돌봄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택배 노동자, 청소 노동자, 요식업 종사자, 자살 예방 센터의 상담원이 친밀성이 결여된 자리에서 마치 가족처럼, 우리를 먹이고 입히며 노동력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한편》 19호 '혼자', 민음사, 73-74쪽
그저 있기 위해
도하타 가이토,『있기 힘든 사람들』

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 그저 있기만 할 수는 없을까요? 임상심리사인 저자 도하타 가이토가 돌봄 시설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있기being’가 주제라고 직접 천명합니다. ‘있기’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돌봄을 경시하는 사회는 위험한 장소이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일인 ‘있기’가 가능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책은 사회적인 억압, 장애 등의 이유로 ‘있기’가 어려워진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함께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놀고, 그냥 앉아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있는 돌봄을 발견하면서요.
이야기의 초반, 학위를 마친 가이토가 돌봄시설에서 처음 받은 업무는 다소 의아합니다. 일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은 ‘대충 앉아 있기’였거든요. 거처형 돌봄시설로 분류되는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설에 오는 사람들을 돌보려면 고된 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지만, 노동의 목적은 재활치료보다는 사회에 있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일에 있었습니다. 읽다 보면 저자와 함께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은 책인데요. 이 배움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래도 괜찮을까?’의 허무주의에 맞서는 돌봄의 시간을 만나게 될 거예요.
'있기being'는 누군가가 옆에 앉아 있음으로써 가능해진다.
- 도하타 가이토, 『있기 힘든 사람들』, 다다서재, 15쪽
계속 있기 위해
『가까스로-있음』

코로나19 팬데믹이 일깨워 준 망각하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과, 우리 눈에 보이는 동식물 일부가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덕분에 우리는 바이러스나 사물, 지역의 일상에 포섭되지 않는 생태계의 여러 부분이 인간처럼 세계를 구성하고 세계에 작용하는 주체라는 지식을 얻었거나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더욱 가속 중인 기후 위기와 전지구적인 폭력의 문제는 해법이 보이지 않는 문제 같습니다. 이는 어차피 세상은 망했다며 다음을 포기해버리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해요.
이 책은 이 파국을 초래한 인간의 역사와 인간 중심의 이론들을 성찰하고, 인류세에 사회학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숙고합니다. 김홍중은 브뤼노 라투르의 사유를 통해 세계의 작동을 인간에게 환원시키는 사회학의 오랜 관점을 비판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지니는 초월의 잠재력을 읽어냅니다. 셀 수 없는 연결들로 이루어진 각각의 존재는 그 연결들의 변화에 따라 다음 순간에 그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있기가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스스로 자리를 지켜냈기 때문이 아니라, 매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소멸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겨 또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넘어 모든 것과 함께 계속 있기 위해서는 이처럼 급진적인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이 파국 속에서 함께 계속 있기 위해, 만물의 지배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동등한 가이아의 시민이 되어보자고 제안해요.
세계는 가까스로 존속해 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존재자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많은 가까스로 있는 것들로 세계가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약하거나 강하거나, 거대하거나 극미하거나,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의 반복 속에 있으며, 그런 한에서 간신히 있다.
- 김홍중, 『가까스로-있음』, 이음, 298쪽
잘 있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통’을 붙여 고통을 표현하는 조어가 유행하는 모습은 삶이 피로하다는 감각을 너도나도 느낀다는 방증 같아요. 특히 ‘존재통’이라는 말은 있기가 얼마나 그 자체로 힘든 일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있기를 의식하지 않는 게 아니라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있을 수밖에 없다면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지나친 존재통은 줄여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파국을 살아가는 위기감과 피로를 함께 있는 힘으로 전환해 보는 것은, 읽기를 통해 함께 있기를 도모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앞에서 보았듯 우리가 잠시 혼자일 때에도, 읽기는 우리를 이어주고 바꿔줍니다. 일상의 풍경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더라도, 이 책들과 이루는 연결이 조금 더 잘 있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있어.”라고 하지 않고 “잘 있어.”라고 인사하는 것은 아마 이런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