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의 시작, 바이마르

예술과 기술이 통합된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시작된 곳

홈페이지: Klassik Stiftung Weimar
Klassik Stiftung Weimar

디자인이나 예술에 종사하거나 관심 있는 분이라면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바우하우스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를 소개해 왔고, 바우하우스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들과 그들이 만든 혁신적인 가구들은 전성기 시절인 데사우와 베를린에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바우하우스는 원래 독일 동부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Weimar)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우하우스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바로 바우하우스의 시작점인 바이마르에서의 초창기 바우하우스 이야기와, 오늘날 이 도시가 바우하우스를 어떻게 기억하고 경험하고 있는지를 전하려 합니다. 바우하우스의 흔적을 따라 잠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우스하우스 학교 (Bauhaus-Universität Weimar)

Bauhaus-Universität Weimar
Bauhaus-Universität Weimar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Weimar)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세운 예술과 디자인 학교입니다. 당시 바이마르에는 이미 두 개의 예술 학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하나로 통합해 새로운 교육의 장을 열게 된 것이죠. 예술, 공예, 건축을 하나로 아우르며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 교육을 실현하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초기 바우하우스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했는데,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게르하르트 막스(Gerhard Marcks), 파울 클레(Paul Klee),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주로 표현주의나 추상주의 경향을 지닌 예술가들이었고, 덕분에 초창기 바우하우스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깔끔하고 기능적인 이미지보다는,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시도들이 더 두드러졌습니다. 실용성을 추구하면서도 예술성을 놓치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이 탄생했지요.

바우하우스는 태생부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독일에서,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죠. 나중에 데사우(Dessau)로 옮긴 뒤부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디자인 철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 토대는 바이마르 시절 실험적인 정신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바우하우스가 없었다면 이후의 발전도 어려웠을 겁니다.

1925년, 정치적인 압력으로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이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이마르에 남겨진 건물들은 현재 바우하우스-바이마르 대학교(Bauhaus-Universität Weimar)로 운영되며, 건축, 디자인, 예술 분야에서 여전히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 교육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특별함은 바우하우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오랜 시간 독일 문화의 중심이 되어 왔죠.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는 유럽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문화의 중심지였고, 괴테와 실러 같은 당대 최고의 문학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모더니즘의 출발점인 바우하우스의 유산이 살아 숨 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고전과 현대, 문학과 디자인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이 작은 도시가 독일 문화사에 남긴 자취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Haus am Horn

Klassik Stiftung Weimar
Klassik Stiftung Weimar

Haus am Horn은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가 실제로 구현한 유일한 건축물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주택을 넘어, 바우하우스의 철학과 디자인 원칙이 그대로 실현된 살아 있는 현대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집은 1923년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위해 지어졌고, 당시로선 새로운 개념의 주거 공간을 대중에게 소개하고자 한 실험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Haus am Horn은 바이마르의 일름 공원(Park an der Ilm) 안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화려한 관광지들과는 거리가 먼, 조용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이 건물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면 공원 안에 세워진 작은 주택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바로 이 건물의 핵심입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간결함 속의 기능미’를 오롯이 보여줍니다.

내부에 들어가 보면 놀랍고도, 동시에 놀랍지 않은 인테리어가 펼쳐집니다. 놀라운 점은 이 집이 당시의 장식적이고 복잡한 주거 공간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경사 지붕 대신 평지붕을 택하고, 공간의 동선을 철저히 고려한 실용적인 가구 배치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주거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놀랍지 않은 이유는, 이 집이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현대적인 주거 공간의 ‘원형’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미 익숙해진 어떤 기준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내에 배치된 가구들 역시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알마 지드호프-부셔(Alma Siedhoff-Buscher) 등이 제작한 가구는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입니다.

Haus am Horn은 단순한 ‘과거의 건축물’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주거 철학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 번쯤 들러봐야 할,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장소입니다.

europeanheritageawards-archive.eu
europeanheritageawards-archive.eu

바우하우스 뮤지엄 바이마르(Bauhaus Museum Weimar)

Photo: Massimo Pacifico
Photo: Massimo Pacifico

이 뮤지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해, 2019년에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유산을 보존하는 공간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오늘날에도 새롭게 경험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기획된 곳입니다. 상설 전시는 약 13,000점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우하우스 컬렉션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자체로도 방대한 기록이자 문화 자산입니다. 뮤지엄 건물 역시 바우하우스의 핵심 가치인 기능주의, 단순미, 투명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건축물입니다. 외관부터 내부 동선, 전시 방식까지 바우하우스의 철학이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곳이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방문객이 실제로 디자인 가구를 체험해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전시가 마련되어 있어, 바우하우스의 실용성과 체험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진, 영상, 실물 자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식과 철학을 생생하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전시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빌헬름 바겐펠트(Wilhelm Wagenfeld)와 칼 야콥 유커(Carl Jakob Jucker)의 테이블 램프, 마리안 브란트(Marianne Brandt)의 찻주전자,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격자 의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모던 가구 디자인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우하우스 하면 떠올리는 디자인의 원형 같은 작품들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는 단지 가구 디자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창기에는 그래픽 디자인 역시 중요한 영역이었고, 수많은 실험과 시도가 이뤄졌습니다. 파울 클레(Paul Klee),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 리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등의 그래픽 작업은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습니다. 이들의 포스터와 그래픽 작품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고, 지금 봐도 여전히 강렬합니다.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 기하학적 형태, 미니멀한 구성, 강한 색채 대비.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전통적인 장식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명확한 메시지와 기능성을 지향하는 디자인이 탄생했습니다. 오늘날 모더니즘 그래픽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Plakat zur Bauhaus-Ausstellung in Weimar 1923, Entwurf: Joost Schmidt.
Plakat zur Bauhaus-Ausstellung in Weimar 1923, Entwurf: Joost Schmidt.

저는 바우하우스 100주년이 되던 해에 바이마르를 찾았습니다. 당시 바이마르 바로 옆 도시인 예나에 살고 있었기에, 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예술을 전공했지만, 정작 바우하우스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그저 “새로 뮤지엄이 생겼다니까 한번 가봐야지”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막상 뮤지엄에 들어서고, 전시를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처음 느낀 감정은 낯섦이 아닌 ‘이상하게 익숙한 신선함’이었습니다. 전통을 해체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던 그들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디자인 언어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전시를 본 후, 뮤지엄을 나와 바우하우스 학교도 방문하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Haus am Horn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문득 이 공간이 꽤 오래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구조와 배치, 단순하지만 낯설지 않은 분위기.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예술을 하는 걸까. 예술은 지금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바우하우스는 그런 질문들을 조용히 깊게 던졌고, 그 여운은 지금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