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시게루의 재난 건축
연속성과 유연성으로 다시 묻는 집의 의미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대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 전역을 뒤흔들었습니다. 약 2만 명의 사상자와 17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동일본 대지진이었죠. 거대한 쓰나미는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수백 명의 사람들은 체육관과 같은 임시 대피소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재난으로부터 빼앗긴 것은 단순히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타인들과 한 공간에서 경계 없이 공유하며 노출된 사생활은 ‘내’ 집, ‘내’ 동네가 주는 심리적 안정마저 앗아갔죠. 바로 이때, 도쿄 출신의 건축가 반 시게루(Shigeru Ban)는 이전의 재난 상황에서부터 발전시켜 온 종이 칸막이 시스템(Paper Partition System)을 제안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재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막대한 자본과 긴 시간을 들여 짓는 무거운 집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벼운’ 재료로 누구나 손쉽게 제작 가능하고, 커튼을 여닫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사용자가 사생활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집이 필요했던 것이죠.

이처럼 반 시게루는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지금 당장의 실재적 쟁점은 무엇인가?" 1를 끊임없이 자문해왔습니다. 이는 건축적 재난 구호 단체인 VAN(Voluntary Architects’ Network)의 설립으로 이어지죠.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재난 현장에서 보여준 해법들이 평소 그가 건축가로서 천착해 온 공간의 ‘연속성'과 '유연성'이라는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법론들의 의미는 무엇이고, 과연 재난 건축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그리고 이것은 ‘집’의 본질적 의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의 인터뷰와 작품들을 함께 따라가 보시죠.
'이중적' 연속성
"저는 내부 외부 공간 사이의 연속성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2
반 시게루는 한 인터뷰에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탐구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의 초기작인 1995년 작, 커튼 월 하우스(Curtain Wall House)에서 여실히 드러나죠.
이 주택의 외벽은 콘크리트나 벽돌 같은 견고한 재료 대신, 전체를 여닫을 수 있는 대형 커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거주자의 ‘선택’에 따라 커튼의 개폐 정도가 정해지는데요, 이는 거주자가 집 내부와 외부 도시 공간 사이에 ‘다양한 연속성의 층위’를 설정할 수 있게 하죠.

특히 커튼 외벽과 내부 슬라이딩 도어의 사이에 놓인 테라스 공간은 이러한 연속성의 층위를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커튼을 치고 도어를 열면 테라스는 ‘외부 같은 내부’가 되고, 반대로 커튼을 걷고 도어를 닫으면 ‘내부 같은 외부’가 되는 것이죠.

이처럼 고정된 벽이 아닌 가변적 요소를 통해 만들어낸 그의 ‘이중적’ 연속성은, 그가 탐구한 또 다른 공간적 특성인 ‘유연성’으로 연결됩니다.
‘의미적’ 유연성
“일본에서는 … 일 년 내내 똑같은 공간을 갖지만 그 대신, 움직이는 요소를 통해 공간을 유연하게 만들어냅니다." 3
반 시게루는 연속성과 더불어, 공간의 ‘유연성’에도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본 전통 주거에서 나타나는 미닫이 벽이 그러한 예시죠. 이러한 특성은 그의 주택 프로젝트를 넘어, 다른 프로그램의 공간에서도 발견됩니다.
2007년 작, 니콜라스 하이에크 센터(Nicolas G. Hayek Center)는 스와치(Swatch) 그룹을 위한 건물로, 총 7개의 시계 브랜드가 입점해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각 브랜드 매장으로 직행하는 7대의 유압식 엘리베이터입니다. 이는 단일 엘리베이터가 전 층을 관통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사용자가 ‘방문 목적’에 따라 동선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죠.

또한, 전면에 설치된 4층 높이의 유리 셔터는 개방되는 순간, 건물 내부를 일시적으로 도시와 연결된 ‘반(半)외부적인 공간’으로 경험되게 하는데요, 이는 단순히 가변성을 가진 요소의 물리적 변화가 아닌, 이를 통해 단일한 공간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는 ‘의미적’ 유연성을 이끌어내는 것이죠.

이처럼 반 시게루가 탐구한 공간의 연속성과 유연성은 사용자의 ‘선택’에 반응하는 ‘가변적 요소’를 통해 내부와 외부, 건축과 도시 더 넓게는 사적과 공적의 연결 그 사이에서 의미의 풍부함을 가진 ‘중간 공간’을 형성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중간 공간’은 사용자 스스로가 공간을 정의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죠. 이는 곧, 재난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무력해진 개인이 자신만의 ‘집’을 정의하며, 잃어버린 삶을 되찾는 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재난의 현장, 삶을 다시 정의하는 ‘중간 공간’
반 시게루는 1996년 8월 건축적 재난 구호 단체인 VAN을 설립한 이후로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필리핀,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의 재난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재난 건축에서는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연속성과 유연성을 가진 ‘중간 공간’을 확인할 수 있죠.
가령,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평지 부족으로 임시 주택을 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오나가와(Onagawa) 지역에서 그는 선박용 컨테이너의 적층을 제안합니다. 그가 제안한 바둑판 식 적층은 컨테이너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어 내죠. 이러한 빈 공간은 ‘외부’의 햇빛을 받아들이고 거주자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채워 나갈 수 있는 거실과 주방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거실과 주방 사이의 홀딩 도어는 선택에 따라 공간을 확장하고 분리하는데요, 이는 반 시게루가 의도한 사용자의 선택에 반응하며, 스스로가 ‘집’의 의미를 찾아가게 만드는 ‘중간 공간’을 의미하죠.
동시에, 재난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는 있지만 완제품으로서 정해진 규격을 가지고 있어 개구부를 뚫는 등 유연한 사용이 어렵다는 컨테이너의 재료적 단점도 해결합니다.

2014년 필리핀의 태풍 재해 구호 프로젝트에서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맥주 상자로 임시 대피소의 기초를 쌓고, 반 시게루의 상징과도 같은 종이 튜브를 사용해 골조를 구성합니다. 여기에 더해 코코넛 합판과 대나무, 야자 잎과 같은 현지 재료를 바닥과 벽에 덧대죠.

이렇게 만들어진 주택 내부는 사용자만의 방식으로 채워질 기초적인 틀을 제공할 뿐 그 안에는 공간을 나누는 기둥도, 견고한 벽도 없습니다. 또한, 기존의 텐트형 대피소와는 달리 현지 대나무로 엮은 벽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시시각각 변하며, 내부에 외부의 빛을 드리웁니다.

이처럼 반 시게루의 '중간 공간'은 사용자의 선택에 반응하며, 내부와 외부의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재난 건축에서 집의 본질적 의미를 잃어버린 이재민들에게, 단순한 물리적 거처를 넘어 스스로 삶을 정의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을 회복시켜주죠.
임시와 영구, 그 ‘중간’의 건축
"영구적인 건물이라도 사랑받지 못하면 폐허가 됩니다. 반대로, 임시 건축물이라도 거주자와 일반 대중이 자랑스러워한다면 오래 지속될 수 있죠." 4
반 시게루가 종이와 컨테이너, 그리고 맥주 상자로 지은 것은 단순한 물리적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재해로 삶의 터전과 통제권을 모두 상실한 이재민들에게, 커튼을 열고 닫거나 미닫이문을 움직여 자신만의 영역을 구획할 수 있게 한 것은 단순한 기능적 편의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무력해진 개인이 공간의 경계를 스스로 조절하며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무너진 일상의 주도권을 아주 ‘사소한 행위’에서부터 다시금 쥐게 만드는 건축적 장치였죠.
결국 그에게 집의 의미란 거주자가 주체적으로 공간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남겨두는 데 있습니다. 가장 약하고, 가벼운 재료로 가장 절박한 곳에 세워진 그의 건축은, 우리에게 건축이 현시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거주'란 무엇인지 묵직한 물음을 던집니다.
1 DETAIL, Interview with Shigeru Ban: Origin and Attitude(2023.04.12)
2 BAN, Shigeru Ban on his design at Nieuw Zuid(n.d.)
3 AZURE, Shigeru Ban’s Temporary Architecture is Made to Last(2020.03.02)
4 DELABIE, Interview with Shigeru Ban: Emergency architect(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