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미술은 무엇을 보게 하는가
산티에고 시에라와 토마스 허쉬혼이 드러내는 솔직한 미술
나는 언제부터인가 미술에서 아름다움만을 찾는 일을 멈추었다. 쳐다보고 싶지 않을 정도의 어두움을 삼킨 작품이나, 걱정스러울 만큼 도발적인 작품, 혹은 시각적으로 편하지 않은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머릿속에서 쉽게 그 자취를 감추지 않는다. 아름답지 않은 작업은 솔직하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들과의 첫 조우는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들여다볼수록 더욱 생각나고, 아름답지 않기에 멀리했던 이야기들을 내 편 안으로 끌어올 수 있게 한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러한 솔직함을 간직한 두 개의 작업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와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이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다만 소개할 두 작가의 작업은 ‘그림’, 즉 회화가 아니기에 감상을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미지가 무제한으로 복제되고 또 창작될 수 있는 세계에서, 이미지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현대미술을 사유한다는 일은 난해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는 오히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니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 두 작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베니스 상인들
2년마다 열리는 세계 최대의 예술 축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시에라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엔날레로부터 할당받은 시에라의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비엔날레 바깥에서 이미 익숙하게 마주쳤던 집단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바닥에 돗자리를 펼치고 가짜 명품 가방을 판매하는 불법 노점 상인들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들의 머리가 하나같이 새노랗게 염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순간 ‘당신들이 왜 이곳에?’라는 의문을 품으며, 아마도 이들이 노점 상인을 연기하는 배우일 것이라 넘겨짚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시에라의 ⟨133 Persons Paid to Have Their Hair Dyed Blond⟩로, 작가는 실제 베니스의 노점 상인들에게 60달러를 지급하는 대가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도록 제안했다. 이 노점 상인들은 대부분 세네갈, 중국,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 노동자였으며, 참여 조건은 단 하나—원래 머리색이 검은색일 것이었다.


Santiago Sierra, "133 Persons Paid to Have Their Hair Dyed Blond", 2001
이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교양 있는 예술 여행객으로서 들뜬 마음으로 비엔날레를 관람하던 관객은 미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나의 티켓값은 이들의 머리 염색을 가능하게 한 자본의 일부였다는 점, 그리고 비엔날레 관람을 마친 뒤에도 여전히 거리에서 노란 머리를 한 채 장사를 이어가는 상인들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게 시야에 들어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불편함은 전시장을 떠난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불편함은 시에라가 자신의 작업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구축해온 감각이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타인을 퍼포머로 고용하고,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대표적인 예로 ⟨160cm Line Tattooed on Four People⟩(2000)에서 시에라는 헤로인 중독 여성 네 명에게 헤로인을 지급하는 대가로 등에 40cm 길이의 문신을 새기도록 했다. 또 다른 작업 ⟨A Person Paid for 360 Continuous Working Hours⟩에서는 한 경비원을 시간당 10달러에 고용해, 360시간 동안 전시장 벽 뒤의 밀폐된 공간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인간의 몸이나 노동이 가격으로 환산되는 순간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퍼포머가 수행하는 과제는 그 자체로 착취적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작업은 윤리적인 지적을 피해가지 못한다. 반복되는 그의 작업 방식에서 그가 제시하는 솔직함은 크게 두가지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미술계 내부를 향한 솔직함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날 세계를 작동시키는 원리에 대한 솔직함이다.

첫 번째 솔직함은 미술계의 작동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미술은 종종 돈과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미술이 가장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2024년 기준 세계 미술 시장 규모는 약 600억 달러에 달했지만, 그 내부의 노동 조건과 보상 구조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예컨대 베니스 비엔날레는 참여 작가에게 공식적인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가가 작품 제작비와 운송비, 설치비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는 구조 역시 오래도록 유지되어 왔다. 반면 다수의 어시스턴트나 퍼포머가 필요한 작품의 경우, 수익이 어떤 기준으로 분배되는지는 외부에서 거의 가늠할 수 없다. 이 모든 불투명함은 ‘미술이니까’라는 모순적인 합의 위에서 작동한다. 시에라는 적어도 이 지점에서만큼은 솔직하다. 그는 자신의 작업 속 등장하는 퍼포머가 자신과 어떠한 경제적 관계로 얽혀있는지 숨기지 않는다. 즉, 그의 예술 역시 자본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과 공모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시에라 작업의 두 번째 솔직함은 미술계 바깥의 세계로 확장된다. 모든 것,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가격이 매겨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얼마를 받는다면 자신의 머리를 노랗게 염색할 수 있는가? 당신에게 60달러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베니스의 노점 상인들에게 가해졌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혹은 얼마나 같은가? 머리 염색이 아니더라도 경제적 보수는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을 좌우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라의 작업은 인간의 ‘가격’에 격차를 만들어내는 사회적·정치적 조건에 대한 암울한 명상으로 읽힐 수 있다.
시에라가 재현하는 세계는 아름답거나 희망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의 작품 속 세계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 모습이야말로 현실과 닮아 있다. 공동체는 화해와 합의로 이루어진 이상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갈등과 권력 관계로 구성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에라는 이 세계를 거부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업은 정확히 이 세계를 ‘보고’ 있다.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보는 것은 언어 이전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보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 정보를 수용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인식하기로 '선택'할 것인가를 포함하는 적극적인 선택의 문제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 선택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작업은 그 선택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미술 여행객을 마주한 브롱스 주민들
이제 무대는 뉴욕 브롱스 지역의 공공주택 단지로 옮겨간다. 이곳에서 허쉬혼은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Dia Art Foundation)의 커미션을 받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공공미술이 흔히 취하는 기념비적 형식—즉, 영웅적이고 수직적인 조형물—이 아니라, 77일간 지역 주민과 함께 수행되는 일시적 프로젝트, 일종의 반(反)기념비였다.
⟨그람시 모뉴먼트⟩(2013)의 풍경은 다음과 같다. 삐뚤빼뚤한 손글씨 현수막이 주택 단지 곳곳에 걸리고, 합판과 비닐로 만든 임시 구조물이 잔디 위에 세워진다. 주민들은 일상의 사건을 기사로 작성해 ⟨그람시 신문⟩을 발행하고,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위한 미술 수업과 안토니오 그람시에 관한 공개 강연을 연다. 이 모든 일은 2013년 여름, 뉴욕 브롱스의 한 공공주택 단지에서 실제로 진행되었다.


Thomas Hirschhorn, "Gramsci Monument", 2013
이 작업의 첫 번째 불편함은 장소의 선정에서 비롯된다. 허쉬혼은 예술 제도의 주요 관객이 될 수 없는 커뮤니티의 한가운데에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예술 여행객과 지역 주민 사이의 낯선 조우를 만들어낸다. 외부인은 작품을 경험하기 위해 주민에게 의존해야 한다. 주민이 운영하는 라디오를 듣고, 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그들이 안내하는 동선을 따라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뉴욕 예술계의 엘리트들과 지역 주민 사이의 위계는 일시적으로 전복된다.
그러나 이 만남은 결코 따뜻하지 않다. 예술 여행객의 방문은 환대라기보다는, 경계와 불신이 섞인 불청객의 방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어색함은 단순히 낯선 타자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 미술은 스스로를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 말해왔지만, 그 명제가 실제의 장소에서 구현되는 순간 드러나는 낯섦은, 예술이 말해온 포용의 언어가 얼마나 제한된 세계 안에서만 유통되어 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예술계는 탈식민주의, 탈인종, 탈성별과 같은 정치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호출해왔지만, 허쉬혼의 작업은 그러한 제스처가 혹시 듣기 좋은 윤리적 언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그는 이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거나 봉합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 어색함을 고스란히 안은 채 브롱스를 떠난다.
두 번째 불편함은 작가가 지역 주민과 유지하는 거리감에서 발생한다. 허쉬혼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설계하지만, 그 안에서 주민들의 선택과 행위에 개입하지 않는다. 연극이나 퍼포먼스의 완성도에 개입하지 않고, 교육의 성과를 측정하지도 않는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다소 엉성한 무대, 미완의 그래피티, 서툰 공연들이다. 허쉬혼에게 작업의 목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업의 핵심은 “현실, 실패, 무관심의 잔인함, 그리고 서로 부합하지 않는 복잡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에 있었다. 아름다운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 외형적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이 광경을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시에라와 마찬가지로 허쉬혼의 작업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의 작업은 현실과 단순히 공모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람시 모뉴먼트⟩는 이후에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되었고, 일부 프로그램은 작업 종료 이후에도 비공식적으로 이어졌다.
작품의 솔직함을 받아들이는 태도
시에라와 허쉬혼의 솔직함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그 불편함 앞에서 시선을 돌릴 것이고, 누군가는 그 솔직함을 곱씹어 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두 작업이 만들어내는 감각을 따라가다 보면 관람자는 방관자든 공모자든, 혹은 당사자든 간에 자신이 이미 그러한 구조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이 감각은 미술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사회과 작동하는 방식과 맞닿는다. 그렇기에 이 두 작업은 분열되고 불완전한 오늘날의 주체에게 오히려 더 적합한 예술적 경험의 방식을 제안한다. 클레어 비숍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실천은 “지배적이고 선재하는 합의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며, 가치가 어떻게 전유되고 재배치되는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비판적 힘”으로 작동한다.
이 두 작업이 당신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남겼기를, 그리고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해왔던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Thomas Hirschhorn, “‘Gramsci Monument’ at Forest Houses, The Bronx, NYC”, Thomas Hirschhorn: Gramsci Monument, Walther König, 2015, p. 57.
Claire Bishop, “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 October, no. 110, 2004, pp. 51–79.
박혜연,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관객이 창출하는 지적 평등: 토마스 허쉬혼의 그람시 모뉴먼트」, 미술사학 제48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4, pp. 93–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