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기꺼이 돕는 사람들

위험한 상황에서도 남을 돕는 사람들의 공통점

그럼에도 기꺼이 돕는 사람들
이미지 출처 IMDB <The Zone of Interest>

한 사람의 의존 뒤에는 늘 누군가의 수용이 뒤따릅니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이 행위를 단순한 선의로만 설명하기엔, 어떤 도움은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도움을 택했던 사람들과, 그 손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살펴봅니다.


수용자들을 위한 사과를 남기던 소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미지 출처 IMDB <The Zone of Interest>

제76회 칸 영화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작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청각을 극대화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가족을 중심으로, 영화는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집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을 다룹니다.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지 못한 채 상상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저 평온해 보이는 회스 가족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더욱 잔혹하게 다가옵니다.

영화 속 사과를 놓는 아이, 이미지 출처 IMDB <The Zone of Interest>

악인의 일상성이 계속 부각되는 가운데, 한 명의 용감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밤마다 수용소에 몰래 들어가 수용자들을 위해 사과를 남겨두는 한 소녀입니다. 소녀의 모습은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되어 마치 야간 투시 화면처럼 비밀스럽게 연출됩니다. 영화 전반의 강렬하고 선명한 색감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이 연출은 소녀가 회스 가족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실존 인물의 집과 피아노에서 촬영한 장면, 이미지 출처 IMDB <The Zone of Interest>

이 소녀는 감독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만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에 거주하며 폴란드 저항군으로 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영화 속 장면처럼, 그녀는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캠프 근처로 가 굶주린 수용자들을 위해 사과를 남겨두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상 수상 소감을 통해 그녀에게 이 상을 바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학대받는 소녀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 가장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에서 실제로 벌어진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픽션입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20세기 주로 아일랜드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기관으로, 도덕적 교정이라는 명목 아래 여성들을 감금해 강제노동과 폭력이 가해지던 곳이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IMDB <Small Things Like These>

영화의 주인공 ‘빌 펄롱’은 석탄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며 다섯 딸을 키우는 집안의 가장입니다. 마을의 수녀원으로 배달을 다니던 그는 그 곳에서 학대 당하는 한 소녀를 알게 됩니다. 그가 목격한 일에 대해 수녀원은 침묵을 요구하고, 은근한 압박과 함께 현금 다발을 건네기도 합니다.

이미지 출처 IMDB <Small Things Like These>

영화 내내 소녀를 향한 빌 펄롱의 감정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신 극중 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의 섬세한 연기와 그의 행동을 탐탁지 않아 하는 주변인들의 시선과 말을 통해 한 인간이 겪고 있을 고뇌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영화는 그저 빌 펄롱의 시선을 조용히 따라가며, 말미에 그가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실제로도 막달레나 세탁 시설 속 여성들의 탈출을 돕거나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 존재했습니다.

이타적 행동은 고차원적인 능력이다

책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저차원의 모든 과정을 종합해 하나의 이타적 성격처럼 보이도록 평균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근본적 원인이나 유전자가 변수로 반영된 게 아니라 여러 유전자와 초기 성장 환경, 양육, 문화, 신념, 개인적 목표가 모두 합쳐진 결과다." _스테퍼니 프레스턴,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

이미지 출처 IMDB <Small Things Like These>

책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는 ‘이타적 반응 모델’을 토대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자세히 규정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누군가의 영웅적인 행동은 성격뿐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됩니다. 이론은 성격을 동기로 보는 기존 심리학 연구가 대개 자기보고식 설문지에 의존해 왔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합니다. 설문 형식의 연구로는 위험도와 변수가 다양한 현실 세계 속 사람들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 모델은 이타적 행동 동기의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요인으로 ‘전문성’을 꼽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외적 행위는 대체로 수많은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얻게 된 비범한 힘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모델이 꼽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자기효능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이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껴야 이타적인 행동을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타적 반응 모델은 긍정성 편향, 영성 등의 다양한 요인이 남을 돕는 구조 행동의 동기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The Zone of Interest> 소녀의 실존 인물, 영상 출처 A24 유튜브 채널

연대와 다정함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는 남을 돕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접촉'을 강조합니다. 나치 정권 당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도왔던 수백 명의 증언을 분석한 결과, 구조자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 다수가 전쟁 이전부터 유대인 이웃, 친구, 직장 동료와 친밀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타인과의 접촉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집단 간 갈등을 줄이는 방법으로 중요하게 논의됩니다. 책은 인종 분리 교육이 폐지되던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사례를 들어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백인과 흑인 간의 접촉이 흑인에 대한 편견을 완화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학교, 군대, 기숙사, 그리고 하나의 지역 사회를 배경으로도 동일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Small Things Like These> 트레일러, 영상 출처 Lionsgate Movies 유튜브 채널


두 책을 통해 한 가지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단순히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각자가 지닌 다양한 능력과 요소가 반영된 고차원적인 행위라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두 영화 속 인물들이 한껏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수용소에 사과를 남겨둔 소녀의 행동에는 저항 운동을 통해 얻은 민첩성이라는 전문성, 과거 수용자들과의 접촉 경험이 큰 동력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빌 펄롱 또한 다섯 딸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높은 전문성과 자기효능감을 가진 인물로도 보입니다. 사실 그의 유년 시절에는 죽은 친어머니 대신 그를 키워준 한 명의 은인이 존재했습니다. 그에게 각인된 그 돌봄의 경험이, 훗날 수녀원의 소녀를 외면할 수 없게 한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결보다는 단절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개인의 타고난 성정이 이타적 행위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 필자에게는 작은 위안으로도 느껴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내가 하는 일의 전문성을 기르고, 남을 돕는 주변 사람들을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우리 모두는 조금씩 더 이타적으로 자라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기꺼이 돕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