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고 잔인한 영화에 왜 이끌리는가

더럽고 잔인한 장면을 혐오하고 욕망하는 아브젝시옹

불쾌하고 잔인한 영화에 왜 이끌리는가
이미지 출처: 영화 '살인의 추억'

세상은 아름다운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밝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면, 반대로 어둡고 추한 면이 존재하는 법. 이때의 불균형은 예측할 수 없고 때때로 솔직한 편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볼 때, 더럽거나 잔인한 장면이 등장한다면 어떤 감정이 드는지 떠올려 보자. 관객 취향에 따라 반응은 가지각색이겠지만, 대체로 불쾌함을 느끼며 자리를 뜨거나 실눈을 뜨거나 응시하면서도 찝찝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중에는 혐오스러운 장면을 내포한 작품이 많다. 관객들은 분명 불쾌함을 느꼈으면서도, 비슷한 수준의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를 계속해서 감상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에 은밀히 매혹되는 심리가 숨어있다. 공포영화를 보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흥분 상태에 도달한다는 신체과학적인 특성이 아니다. 고어, 좀비, 슬래셔 장르처럼 일부 취향에 관한 분석도 아니다. 이 심리는 우리가 혐오감을 느끼는 장면에 등장하는 피, 땀, 살, 똥 같은 것들이, 우리 신체의 일부였다는 접근에서 시작된다.


불쾌함과 매혹이 뒤엉키는 현상

Kiki Smith, ‘Untitled (Hair)’, 1990, 이미지 출처: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

각종 체액이나 분비물 등 인간의 몸을 구성했던 중요한 존재도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단지 얄팍한 경계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는 이유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해석한다. 주체(자신이나 사회)로부터 탈락되어 유출된 객체를 ‘아브젝트(abject)’, 그리고 이런 아브젝트가 다시 주체를 향해 다가올 때 발생하는 두려움과 혐오가 바로 ‘아브젝시옹(abjection)’이다. 낯선 단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아브젝트를 만들고 아브젝시옹을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모발에 좋다는 샴푸로 정성스레 머리를 감고 나서 수챗구멍에 쌓인 머리카락을 치울 땐 더럽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이미 떨어진 머리카락이 다시 내몸에 달라붙거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된다. 땀이나 혈액, 배설물도 마찬가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er

이처럼 아브젝트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 얄팍한 경계를 오가며 질서를 교란한다. 이 과정에서 아브젝시옹은 혐오감을 형성해 우리를 보호하는데, 마치 잔인한 장면으로부터 실눈을 뜨게 만드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브젝트는 보통 생존과 직결된 경우가 많다. 영화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단백질 블록을 떠올려 보자. 한때 양갱을 닮았다고 화제가 된 이 음식은 하층 계급 사람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주식이지만, 역겨운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상황은 반전된다. 영양 덩어리가 혐오 덩어리 취급을 당하고,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하면서도 역겨운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영화 ‘설국열차’

그런데 역겨운 아브젝트에 어떻게 은밀히 매료될 수 있는가. 불쾌한 장면에 이끌리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아브젝트는 주체를 유혹하고 삼켜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비천한 것들에 매혹되는 경험을 종종한다. 타인의 여드름이 터져나온 분비물이 내 뺨에 닿는 건 끔찍하지만, 고름을 짜내는 영상의 조회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처럼. 샛노란 아브젝트가 자아내는 역겨운 쾌감, 논두렁에서 넘어져 진흙범벅이 된 예능인이 주는 웃음, 핏줄기가 스크린을 새빨갛게 만드는 영화 <킬빌>과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즉, 불쾌하면서도 매혹적인 장면에도 설득력이 생긴다.


관객을 압도하는 숭고함

이미지 출처: 영화 ‘미드소마’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에 비천함과 숭고함이라는 양면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비천한 것이 아브젝트의 기본 속성이라면, 숭고함은 무엇일까? 숭고하다는 표현은 보통 거대한 산과 망망대해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대자연을 마주할 때 사용한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이 떠오르지만, 숭고함에서 발견되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경악’이다. 경악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상태로, 약간의 공포를 수반한다. 즉, 숭고함에는 경탄과 공포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느껴지는 장면은 영화 <미드소마>에 등장한다. 두려움을 유발하는 시체를 형형색색의 예쁜 꽃으로 꾸민 파격적인 비주얼은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훼손된 시체를 마주하는 공포와 화려한 꽃장식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이 양면성은 숭고함을 연상시킨다.

이미지 출처: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영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는 기형적 생명체들이 등장한다. DNA가 변형되어 모든 동식물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서로 결합된 모습이다. 인간의 시체와 곰팡이, 식물이 하나가 된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일체화는 곧 상호 경계가 무너졌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이 아브젝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때 관객은 불쾌함과 아름다움을 분간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혐오스러울 수 있는 장면에서 일종의 숭고함을 느낀 것이다. 숭고함은 이처럼 구획을 나눌 수 없는 상태이며, 동시에 매혹이다.


종교적 승화와 예술적 승화

이미지 출처: 영화 ‘곡성’

그렇다면 화려한 꽃장식도 없고 아름다움도 느껴지지 않는 불결한 장면도 관객을 유혹할 수 있을까? 영화 <곡성>과 <파묘>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굿판을 떠올려 보자. 엄중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는 굿판에는 동물들이 희생된다. 애꿎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종교의식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었다. 영화 속 굿판에서는 돼지와 닭, 염소를 해하며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린다.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 아브젝트(동물의 피와 살)가 발생하는데, 이는 더 강력한 아브젝트(악령이나 귀신)가 인간이나 마을 공동체로 침입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젝트의 종교적 승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종교의 힘이 약화되면서부터 아브젝시옹은 주로 문화예술의 영역에서 승화되기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 비하인드, 이미지 출처: 씨네21

두 영화 속 굿판에 울려 퍼진 주문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의 액운까지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더럽고 끔찍한 장면이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은 일종의 정화를 선사한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거친 아브젝트는 수많은 업계 종사자의 노고에 의해 철저히 승화된다. 어둡고 으슥한 방에 낭자한 혈흔과 날카로운 범행 도구, 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인물들의 갈등은 전부 픽션이며 철저히 계산적으로 구현된 결과물이다. 더럽고 잔인하더라도 영화의 서사, 연출, 미술 등에 의해 감각적으로 승화된 장면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영화 <기생충>의 미술팀은 반지하방의 리얼리티를 살리고자 음식물 쓰레기를 세트 공간에 뿌려놓을 만큼 불결한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관객들은 냄새를 연상하면서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서도 영화로 승화된 해당 장면의 디테일에 매료된다.


마침내 카타르시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er

영화 속 불쾌한 장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관객은 거의 없겠지만, 연출된 장면임에도 고통과 혐오를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럽고 잔인한 장면을 감상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스크린에 명확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앞에 상영되고 있지만 분명히 허구이며, 이전에 촬영된 영상이라는 감각이 은연중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자신과 근처에 있는 누군가에게서 각종 비천한 분비물이 언제 쏟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은 아브젝트가 주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언제든 코피가 흐르고 머리카락이 빠질 수 있듯,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혼과 시체가 분리될 수 있는 불확실한 삶에서 영화를 통해 연출된 아브젝트는 일종의 거리감을 만들어 준다. 모호한 경계 대신, 확실히 스크린과 객석을 구분 짓는 상태에서 우린 카타르시스(정화)를 느낀다.

이미지 출처: 영화 ‘마더’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가 언어를 통해 운율과 노래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카타르시스가 시적인 리듬을 형성해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마더>의 엔딩 시퀀스를 연상시킨다. <마더>에는 아들의 살인 누명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엄마가 등장한다. 더불어 고물상, 쓰레기 더미, 살인 사건 등이 이어지며 진흙과 피가 반복되어 노출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불편한 서사 외에도 시각적으로 불쾌한 장면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은 거듭해서 비천한 것들을 제시하다가, 마침내 영화 안과 밖에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것은 영화의 음악과 등장인물의 춤사위가 형성하는 시적인 리듬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영화관 밖으로 나서며,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예술로 승화된 아브젝트에서 벗어나 본래 일상으로 돌아가며 정화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아브젝트와 주체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특정 영화와 장면에서 불쾌함을 느꼈음에도, 결코 비천한 장면을 끊어내지 못하고 비슷한 영화를 거듭 감상할 것이라는 암시처럼 다가온다.


더럽거나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상대방의 취향에 대한 배려이자, 자신이 특이 취향을 가진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본격적으로 불결한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찔린다. 그럴 땐 잔인한 장면이 교감신경을 자극해 흥분을 유도한다는 답변보단, 아브젝시옹을 통한 접근이 유용할 수 있다. 훌륭한 영화에 등장하는 불결한 장면은 고도로 승화되었고, 사실 비천함과 숭고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쪽이 낫다. 물론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부분 코딱지와 방귀에 깔깔거리며 ‘뿡뿡이’ 같은 캐릭터에 매료된 시기가 있었다고 답할 수 있겠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 에드먼크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마티, 2019
  • 이상용, 봉준호의 영화 언어, 난다, 2021
  • 김지아, 아브젝시옹에 점령당한 주체, 2020, 연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