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빅 피쉬>와 <보이후드> 아버지를 향한 두 개의 시선

아버지는 가깝고도 먼 대상입니다. 옆에 있어도 쉽게 닿지 않는 거리에 머무르고, 말은 건네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당신만의 완고함으로 권위를 발휘하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연약하게 무너져 작아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가족을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 혹은 딸 사이의 관계가 보다 복잡한 감정의 층을 드러내는 것은 이런 특성이 반영된 결과겠지요.
모호한 대상이기에, 이상적인 아버지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가가는 방식에 변주를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영화의 도움을 빌려볼까 합니다. 팀 버튼의 <빅 피쉬>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한쪽은 환상의 언어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다른 쪽은 실제적인 시간 속에서 아버지를 겪어냅니다.
기억이라는 환상
이야기라는 화해

<빅 피쉬>에서 아들 윌 블룸에게 아버지 에드워드의 인생을 추적하는 단서는 ‘환상적인 이야기들’뿐 입니다. 누구도 잡을 수 없고 어떤 미끼도 통하지 않지만 에드워드 자신만은 포획과 방류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전설의 거대 물고기부터 마녀, 거인, 기이한 서커스단이 등장하는 판타지 한 편만이 무용담처럼 평생 반복되어 왔던 것. 윌이 에드워드로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과장된 서사는 그저 허풍에 불과하며 정작 ‘진실’된 아버지의 모습을 숨기는 장치로 받아들여집니다. 나아가 만담꾼 기질로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해 선망을 얻는 와중에 가정은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원망의 씨앗이 됩니다.
윌과 에드워드 사이 오랜 불화는 에드워드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에 의해 잠시 휴지기를 갖고, 윌은 그 틈에 다시 한 번 속는 셈 치고 ‘결코 일어난 적 없었던 일’을 복기해봅니다. 에드워드가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고 감내한 현실, 고난의 무게, 실패한 순간, 얻어낸 성취, 사랑의 방식, 욕망을 억누른 무의식 등이 은유화된 스토리텔링이 펼쳐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모험은 절정을 이룹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토리텔링은 윌의 언어로 짓게 되죠. 그토록 아버지를 부정하던 윌이었지만 결국 이야기로 합일을 이루게 됩니다.
윌이 그토록 갈구했던 아버지의 진실이란 결코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며, 오히려 삶의 굴곡과 감정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 왜곡될 수 있는 예술 행위라는듯. 아버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한 인물의 세계를 극적으로 재건하는 일로도 여겨집니다.
시간으로 빚어진
인생의 단면

한편 <보이후드>는 과장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도드라진 사건으로 아버지를 조각하지 않습니다. 메이슨 주니어는 텍사스에서 엄마 올리비아, 누나 사만다와 함께 살며 이혼 후 가정을 떠난 아버지 메이슨 시니어를 가끔 만납니다. 아버지는 아이들과 음악을 듣고 정치 이야기를 하며 친구 같은 ‘쿨한 아빠’로 머무릅니다. 물론 그는 메이슨의 삶에서 꾸준히 함께하지 못하고 부재한 존재로 남습니다.
그럼에도 메이슨 주니어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고 가정이 다시 해체되기를 거듭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고 단단해집니다. 그만큼 아버지 메이슨 시니어와의 관계 역시 성숙해지며 그가 점점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익어가는 변화를 목격합니다. ‘쿨한 아빠’에서 조언자가 되는 아버지의 성장도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관계도 나이 들어가며 부자의 애틋함은 ‘사건’이 아니라 ‘시간’ 속에 묻혀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누적되는 대화와 표정, 공간의 변화 등을 통해 감정이 서서히 진화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시간들이 쌓여 인생이 되었다는 감각을 전합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성장이 아닌 대등한 ‘두 인간’의 무르익음 속에서 사랑은 간접적으로 형태를 드러냅니다.
환상과 현실,
그러나 공유하는 세월은 같다


<빅 피쉬>와 <보이후드>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반대의 방식입니다. 과장과 환상, 관찰과 사실의 미학을 각각 따릅니다. <보이후드>는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에 걸쳐 촬영하며 한 소년이 성장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플롯이 되는 구조이기에 <빅 피쉬>와 더욱 대비가 됩니다. 아버지상도 한쪽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꾼’, 다른 한쪽은 일상적이고 서툰 ‘흔남’. 이렇게 두 작품을 대조해보는 재미는 넘칩니다.
그러나 모두를 관통하는 감정도 있죠.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세월을 공유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건, 한순간에 아버지를 용서하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으면서 너무도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는 끊임없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이는 어느날 환상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든, 실제적인 탐색이든 나의 시간과 성장도 담보로 합니다. 그렇기에 부자관계를 엮는 보이지 않던 사랑이라는 뿌리는 언제나 뒤늦은 때에 드러나는지도요.
누구나 마음 속에 자기만의 아버지를 품고 있습니다. 기억과 감정은 실제보다 크거나 작아져 왜곡되거나 때때로 잊히기도 합니다. <빅 피쉬>와 <보이후드>가 말하듯 누군가에게는 허풍, 누군가에게는 따뜻함, 매정함, 멀찍이서 지켜보는 그림자 등 그 형상이 다양하겠지요. 분명한 사실은 이런 모습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 나 자신이 변화하는 만큼이나 아버지도 변화하는 존재임을 떠올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