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현상학 : 표출되지 않은 감정의 존재론

영화, 조각, 회화로 읽는 감정의 다층적 표현

슬픔의 현상학 : 표출되지 않은 감정의 존재론
이미지 출처 : unsplash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만약 '슬픈 표정'을 짓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가장 먼저 상상하지 않을까요? 눈물은 슬픔의 가장 익숙한 표상입니다. 하지만 슬픔이 반드시 눈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살펴볼 세 작품은 동적인 연출이나 강렬한 감정의 폭발 없이도 슬픔과 상실의 깊이를 전합니다. 침묵으로, 공허로, 그리고 몸짓으로 표현된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슬픔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고, 그 다양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 『Manchester by the Sea』 (케네스 로너건, 2016)

영화 <Manchester by the Sea> 상영 포스터

이 영화는 미국의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케네스 로너건의 작품입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있어 그의 탁월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Golden Globes

영화 『Manchester by the Sea』의 주인공 리 챈들러(Lee Chandler)는 비극적인 사고로 세 자녀를 잃고, 그 상실감과 자책으로 인해 아내와의 결혼 생활도 끝나게 됩니다. 퀸시로 떠나 혼자 살던 그는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고향 맨체스터로 돌아오게 되고, 형이 자신의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정했음을 알게 됩니다. 원치 않았던 장소로 돌아온 리는 그곳에서 피하고 싶었던 과거의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합니다.

이미지 출처 : <Manchester by the Sea> 스틸컷

리의 내면에 새겨진 비극의 흉터는 지속적으로 고통과 갈등을 일깨우며, 과거와 현재, 가족과 고독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그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냅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이 점점 퍼질수록 그 농도가 옅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리가 보여주는 무심하게 수렴되는 슬픔은 오히려 더욱 응고되어 묵직한 무게로 자리 잡습니다. 이러한 역설(力說)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게 만듭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한 장면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린 조카와 함께 바닷가를 천천히 거니는 장면에서는 슬픔이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으며, 이 순간은 단순한 상실 이상의 무엇, 단단히 응축된 감정의 밀도를 느끼게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Manchester by the Sea> 스틸컷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슬픔 그 자체보다, 그것을 겪어내는 감정의 무게를 그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대로, 슬픔은 반드시 격렬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하며, 그 침묵 속에서도 깊고 진하게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주인공 리가 보여주는 슬픔은 말보다는 침묵으로, 눈물 대신 공허함으로 표현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억압된 감정(repressed/suppressed emotions)이 내면적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우울증이나 신체적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침묵은 양면성을 지닙니다. 지나친 억압은 병리로 이어지지만, 적절한 침묵은 감정 과부하를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 기제가 될 수 있습니다. 리의 경우, 비표출된 감정 속에서도 천천히 스스로를 추스르며 치유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지 출처 : <Manchester by the Sea> 스틸컷

결국 이 영화는 관객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침묵 속 슬픔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슬픔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야말로, 슬픔을 치유로 나아가는 첫걸음일지 모릅니다. 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뿐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머무는 감정과도 대면하게 됩니다.


조각 『Melancholy』 (알베르트 죄르지)

침묵이 슬픔을 감추는 방법이라면, 때로 슬픔은 형태 그 자체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알베르트 죄르지(Albert Gyorgy)의 조각품으로, 슬픔을 물리적 공간으로 가시화한 작품입니다. 사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실루엣을 닮은 조형물의 상반신 한가운데에 커다란 빈 공간이 자리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미지 출처 : David Oliver books <Melancholy>

알베르트 죄르지는 루마니아 출신의 현대 조각가로, 청동이나 구리와 같은 차가운 재료를 활용해 인간 감정 중 비가시적 측면인 공허, 고독, 상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 독보적인 예술성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2014년, 30년간 함께했던 아내를 잃은 뒤 경험한 깊은 '공허함(void)'을 물리적 형태로 풀어낸 결과물입니다. 개인적 비극을 예술로 승화한 이 조각은, 상실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담아냅니다. 

이미지 출처: pinterest <Melancholy>

작품을 천천히 살펴보면, 인간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지닌 채 힘없이 내려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팔은 온전하지만, 무엇을 감싸거나 붙잡을 가슴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심적인 무게추가 뇌가 아니라 심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몸을 곧게 세울 힘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은 애처로움을 자아냅니다. 거칠게 뜯겨진 듯한 살결의 질감은 내면의 혼란과 감정적 상처를 더욱 생생히 드러냅니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대중 앞에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삶의 극단적인 고통이 또 다른 전환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술은 때로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치유와 성찰의 통로가 되어줍니다. 축적된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과정이 더 큰 자기 이해로 이어질 수 있고, 절망이라고 느꼈던 순간이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술은 변화를 위한 자유로운 여정의 밑바탕을 제공합니다.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슬픔들은 때로는 날카롭고 거칠지만, 시간을 거치며 닳고 둥글어진 형태로 다듬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슬픔과 마주하는 용기를 통해 우리는 극복할 가능성을 얻게 되며, 결국 이전보다 더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림 『At Eternity's Gate』 (빈센트 반 고흐, 1890)

침묵으로, 그리고 공허로 표현된 슬픔을 지나, 이제 우리는 온몸으로 슬픔을 드러내는 한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영원의 문’입니다.

이미지 정보 : 그림 <영원의 문> (또는 <슬픔에 잠긴 노인>)

이 그림 속에는 얼굴을 손으로 완전히 감싼 채, 웅크려 구부정한 등과 축 처진 어깨가 마치 한 노인의 무거운 삶의 흔적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정말 울고 있을까요? 손가락 사이로 앙다문 주먹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눈물을 억누르고 있는지 그림 속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온몸에서 슬픔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옵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스틸컷

이 그림이 제작된 1890년은 반 고흐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해로, 그의 삶에 대한 기대와 애착, 그리고 빛이 서서히 사라지던 시기였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우울증, 그리고 환각 증세에 시달려 왔으며, 프랑스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를 삶의 불안과 고독에서 구원할 해답을 찾지 못한 듯 합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저 노인이 난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에 (그 자신은 아마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귀중하고 고귀한 어떤 것, 벌레의 먹이가 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 이것은 모든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가난한 나무꾼, 황무지 농부 또는 광부도, 자신 가까이에 있는 영원한 집의 느낌을 주는 감정과 기분을 가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고흐가 이 노인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존재의 존엄이었습니다. 영원의 문 앞에 선 이 노인은 반 고흐 자신이자, 유한성을 마주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림 정보 : 영원의 문 (1882), 테헤란 현대미술관 소장

구부러진 등은 삶의 유한함에 짓눌린 고통의 무게를 표현하고, 꽉 쥔 손은 죽음을 마주한 두려움과 분노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그림 뒤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은 삶의 온기가 가까이 있지만 아직 온전한 따스함을 느끼기 어려운 상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스틸컷

이 작품은 반 고흐의 생애와 더불어 그의 죽음을 담은 형상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진리(alētheia)의 활동이라 정의하였습니다. 반 고흐의 극심한 우울과 죽음에 대한 충동이 깃든 이 작품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한 그림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론적 불안을 온몸으로 드러낸 모습이며, 구부정한 자세조차도 삶의 유한함 앞에 선 인간 존재의 진실을 상징합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스틸컷

반 고흐는 온몸이 슬픔으로 엉겨 붙은 채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슬픔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내뿜는 고요하고도 강렬한 파동'이라고 말입니다.


위에 언급된 세 작품,『Manchester by the Sea』, 『Melancholy』, 『At Eternity's Gate』는 슬픔을 단순히 하나의 차원으로 그리지 않고, 다양한 얼굴과 세계로 풀어내려한 시도를 보여줍니다. 침묵으로, 텅 빈 공허함으로, 또는 몸짓으로 우리와 은밀한 대화를 이어갑니다. 

‘슬픔은 지식이다’라는 C. H. 스퍼전의 말처럼, 슬픔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깊이와 삶의 어두운 그늘, 인생이 지나간 흔적들을 깨닫습니다.

리의 침묵은 드러나지 않아도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가르쳐 줍니다. 죄르지의 비어 있는 가슴은 상실이 남긴 창백한 그림자를 보여줍니다. 고흐의 웅크린 몸짓은 삶이 지나가며 각인된 깊은 자국을 읽게 합니다. 

슬픔은 단순한 아픔이나 고통을 넘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슬픔의 다양한 얼굴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더 깊은 이해와 연민으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여를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을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고 통합하며, 삶의 격랑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며 더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