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의 거장을 발견하는 축제들

예술계에는 매번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들이 나오고, 그들이 선사한 충격은 우리 뇌리에 그 이미지를 깊게 새깁니다. 하지만 ‘대단한 예술가는 반짝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상념이 무색할 만큼, 오늘날의 수많은 거장과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 시작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올린 경우가 많죠.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각 분야와 업계에서 준비한, 원석을 가리기 위해 개최되는 수많은 시상식과 축제 등의 행사를 통해 그들의 시작을 알리곤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래미, 아카데미 등의 시상식과 코첼라, 칸느 등의 축제처럼 ‘이미 만들어진 최고’를 뽑는 게 아닌, ‘이제 우리 앞에 만들어질 미래’를 가려내어 내보이는 행사들을 돌아보며, 그 품 안에서 펼쳐지는 새롭고도 멋진 이야기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거장 감독의 등용문, 선댄스 영화제

내년 아카데미상이 벌써 기대될 만큼, 2025년에도 다양한 수작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폴 토마스 앤더슨PTA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그중 최고로 꼽는데요. 서문에서 언급한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의 사례로 반드시 기록될만한 ‘윌라’ 역의 체이스 인피니티는 물론, 제게는 여전히 음악가로 익숙한 테야나 테일러,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네시오 델 토로 등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최고의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만으로 약 3시간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주제로 돌아와,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자 수많은 동료들로부터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PTA가 뉴욕대를 자퇴한 뒤 한 영화제에 단편 영화를 제출하며 그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이미 영화계에서 그 자체로 '신인 감독의 등용문'이라 알려진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는 얼마 전 별세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 로버트 레드포트가 설립한 영화 축제입니다. 1970년대 본인이 분한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라는 역할에서 이름을 따와, 매년 1월 유타 주에서 그 축제를 개최하는데요. 1980년대 소규모 영화제로 시작했지만, 날카로운 큐레이션은 물론, 다수의 상과 프로그램을 통해 독립, 예술, 다큐멘터리 영화 및 창작자를 적극 지원하며 그 규모를 키웠죠. 나아가 다방면에서 영화와 그 산업을 바라볼 수 있는 컨퍼런스 등이 열리며 말 그대로 ‘영화 축제’로서 의미를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댄스 영화제의 위상을 만든 건 해당 축제를 통해 포착된 작금의 거장과 명작의 리스트 만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앞서 언급한 PTA는 물론, <블랙스완>과 <더 웨일>의 대런 애러노프스키, <컨저링>의 제임스 완이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발굴되었죠. 그뿐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데미언 샤젤의 <위플래시>를 비롯해 <아메리칸 사이코>, <리틀 미스 선샤인>, <500일의 썸머> 같은 작품도 선댄스를 통해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고요. 최근 몇 년 사이만 해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코다>, <보이후드> 등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사랑받은 작품이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발굴되는 건 물론, 우리나라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또한 영화제를 통해 알려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줄줄이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선댄스 영화제는 말 그대로 ‘새로운 원석을 발굴하는 행사’의 본분을 다하는 축제인데요. 비록 언급된 이들이 현재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훌륭하고 유명한 이들이 되었지만, 그 시작에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선댄스 영화제의 결승선을 향해 뛰어들던 과거가 있음을 생각하면, 거대한 나무가 자그마한 묘목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큼 믿기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선댄스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축제를 넘어선 음악인들의 천국, SXSW

약자 ‘SXSW’로 더욱 잘 알려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는 매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리는 거대한 축제입니다. SXSW는 어떠한 분야에 한정한 행사로 칭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와 방대한 다양성을 지니는데요. 영화, 인터랙티브 예술, 게임, IT 등 문화, 예술과 연관된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품은 축제죠.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행사는 단연 음악 페스티벌인데요. 라이브 음악과 예술의 도시로 알려지기도 한 오스틴에서 열리는 SXSW 음악 페스티벌은, 한정된 무대에서 여러 아티스트의 공연이 펼쳐지는 게 아닌, 도시 내 수많은 공연장, 라이브 바, 특설 무대 등에서 그 행사가 이어집니다. 이 같은 SXSW의 특징은 행사의 규모가 커지며 새롭게 개최되고 있는 SXSW 시드니, SXSW 런던에서도 그 궤를 함께 하고 있죠.

SXSW가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페스티벌 중 하나가 된 이유는, 그 축제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공연들의 매력 때문이겠죠. SXSW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신진, 인디펜던트 아티스트가 주를 이루지만, 훗날에는 글로벌 히트를 기록한 이들의 이름 또한 함께 기록되고 있습니다. 올해 내한 공연을 펼친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창립한 힙합 크루 오드 퓨쳐Odd Future나, 브루노 마스와 결성한 듀오 실크 소닉으로 더욱 유명세를 퍼뜨린 앤더슨 팩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성장의 기조를 SXSW 쇼케이스를 통해 폭발시킨 대표적인 사례죠. 그뿐 아니라 빌리 아일리시, 자넬 모네, 키드 커디 등 아티스트도 효과적인 성장세 확장과 글로벌 진출을 위해 SXSW에 참여한 바 있고요. 2010년대 중반부터는 ‘코리아 스포트라이트’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f(x), 에픽하이, 크라잉넛 등 유수의 국내 아티스트가 SXSW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최근까지도 새소년, 바밍타이거, 힙노시스 테라피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SXSW에서 한국의 음악 시장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아티스트 선정과 쇼케이스의 결과는 우리나라의 유명 페스티벌 DMZ 피스트레인의 이수정 기획국장이 AAA 매거진의 인터뷰에서 남긴 문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outh by Southwest, SXSW)는 반드시 가야 하는 자리에요. 사실 네트워킹은 오히려 작은 페스티벌에서 더 유효하기도 해요. 그러나 SXSW는 정말 앞으로 잘 될 다양한 신인의 무대를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자리거든요. 엄청난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바이어를 만난다기보다 진짜 유효한 쇼케이스를 보러 갑니다."
- "모든 연결엔 만남이 있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라이브 뮤직 비즈니스 대담” 이수정,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기획국장 | AAA 매거진

그러나 SXSW는 그 자체로 거대한 축제인 만큼,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축제가 열리는 매년 3월, 오스틴에는 음악가들과 함께 에이전시, 프로듀서, 프로모터 등 음악 업계 관계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요. SXSW는 프랑스의 미뎀MIDEM, 영국의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와 함께 세계 3대 음악 마켓으로 불릴 만큼, 아티스트의 쇼케이스를 비롯해 업계 전반의 네트워킹과 비즈니스가 발생하는 컨퍼런스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SXSW에 한 아티스트가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는다면, 단지 업계 관계자들에게 공연을 선보일 뿐 아니라 실제 해외 진출을 꾀할 수 있는 연계 기회가 열려있는 셈이죠. 이처럼 다양한 기회와 희망이 넘치는 만큼, 매년 SXSW 전체가 아닌 음악 페스티벌에만 50개국 이상에서 15만명 가량의 참가자가 모여들고, 1천 건 이상의 쇼케이스 및 컨퍼런스가 열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SXSW는 오롯이 관객이 모여 아티스트의 무대를 일방적으로 관람하는 축제가 아닌, 관객과 아티스트, 그리고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 음악을 즐기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불어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장과 산업이 나아갈 미래를 논하는 흥미로운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SXSW 공식 홈페이지

SXSW 부대표 제임스 마이너 인터뷰 by AAA 매거진

한국에서 피어오르는 독특한 축제들

앞서 해외에서 펼쳐지는 영화, 음악계의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봤다면, 우리나라의 사례도 놓칠 수는 없겠죠. 먼저 영화의 경우, 흔히 우리나라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훌륭한 프로그램과 지원 체계를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작품과 창작자를 발견하는 데에는 독립, 단편 영화제를 살펴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죠. 그중에서도 영화과 학생과 신인 감독들이 가장 눈독 들이는 영화제 중 하나가 미쟝센단편영화제인데요. <추격자>의 나홍진,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우리들>의 윤가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메기>의 이옥섭 등 오늘날 독창적인 스타일을 지닌 다수의 감독이 해당 영화제를 통해 업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미쟝센단편영화제는 2000년대 초 국내에 미진한 장르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다수의 영화감독들이 힘을 합쳐 만든 만큼, 단순히 대중성이나 작가성에만 치우치지 않고, 특색 있는 영화와 감독들을 다수 발굴하곤 했습니다.

미쟝센단편영화제는 코로나-19 및 후원사의 재정 악화로 2021년 폐지 수순을 밟아 영화계의 큰 아쉬움을 샀는데요. 그러나 2025년 새로운 후원사와 함께 21회 영화제를 개최했고, 엄태화 감독의 연출 아래 김고은과 구교환이 출연한 트레일러 티저를 공개하며 큰 관심을 받았죠. 실제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는 매년 수많은 유명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심사위원 및 집행위원, 시상자로 참여하는데요. 올해에는 <비트>와 <아수라>의 김성수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고, <끝까지 간다>의 김성훈, <화차>의 변영주, <과속스캔들>의 강형철,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을 비롯해 배우 주지훈, 김태리, 박정민, 김다미, 전종서가 영화제에 참여했습니다. 또 해당 영화제는 장르별로 나눈 각 부문에 유명 영화 작품의 제목을 붙였는데요. 기존 '희극지왕', '4만 번의 구타' 등 해외 작품의 제목이었던 부문별 명칭을, 올해부터 호러와 판타지 부문의 <기담>, 코미디 장르 부문의 <품행제로>, 액션과 스릴러 장르 부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으로 새롭게 명명하며 우리나라 영화계의 등용문으로서 그 포부를 강렬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어, 음악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우리나라에서도 SXSW와 같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음악 마켓, 컨퍼런스이자 축제인 뮤콘MU:CON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뮤콘만큼이나, 제가 최근 몇 년간 가장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례는, 2027년 음악 특화 전문 공연장 ‘서울 아레나’가 들어설 도봉구 창동에서 운영하는 오픈창동OPCD입니다. OPCD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제이기보단 다양한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인의 창작을 지원하는 플랫폼인데요. 국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플랫폼과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가 무색할 만큼, 지난 몇 년간 꾸준한 창작 지원과 더불어 다양한 양질의 콘텐츠를 선보이며 많은 음악 업계 관계자 및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해 ‘Dopamine’이라는 곡을 통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비트박서 윙WING이 OPCD의 지원을 통해 커리어를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OPCD는 자체적으로 송 캠프, 세미나 등의 신진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건 물론, 더 콰이엇, 소울 딜리버리 등 장르 씬의 베테랑들과 초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오디오비주얼, 유튜브•숏폼 콘텐츠 등 음악과 연계된 창작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 다방면에서 음악 창작자를 돕고 있습니다. 또한 2023년부터는 축제 형식의 OPCD STAGE를 통해 유명 아티스트는 물론 OPCD와 함께 성장하는 신진 아티스트들에게 무대 경험을 제공하고, 2025년부터는 한국대중음악상과 함께 ‘올해의 신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신진 음악가를 서포트하고 있죠.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단순히 대중적으로 성공한, 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과 창작자를 돋보이게 하는 시상식과 축제가 아닌, 앞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계를 이끌어갈 원석을 찾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가공할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행사와 주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글을 정리하며, 주로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행사들이 대부분 ‘시상식’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모습을 지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감명받기도 했습니다. 서문에서 말했듯, 한 해 동안 공개된 작품 중 최고의 것을 선정하는 행사가 그 공로를 치하하는 ‘시상’에 초점을 맞추는 게 맞다면,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예술, 그리고 내가 소속된 영토를 발전시키고 이끌어갈 이들을 발견하는 행사는 그야말로 온 업계가 즐기고 기뻐할 ‘축제’에 가까울 테니까요. 앞에서 언급한 사례뿐 아니라, 공연 예술계의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과 같은 축제도 그렇고, 패션계의 LVMH 프라이즈, 광고계의 YOUNG GUNS 어워즈 등 시상식의 형태를 띠는 행사들의 경우에도, 그 현장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보고 있으면 수상자와 참여자, 심사위원과 기타 관계자 모두가 업계의 새로운 스타를 환영하는 행복한 모습으로 가득한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특히 이런 현장을 보다 보면, 단순히 업계의 베테랑과 거장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 신인들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이제 막 업계에 발을 들이는 이들의 열정과 희망을 바라보며 그 과정을 거쳐온 수많은 이들이 다시금 자신의 초심을 되새기는 듯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죠. 이처럼, 예술계가 새로운 이들을 발견하고, 지원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마련한 축제의 장은, 단지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으려는 목적을 아득히 뛰어넘어, 그 분야와 업계 전체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다시 한번 현재의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불어넣는, 무엇보다 기분 좋은 축제로서 작동하는 것만 같습니다.

박정호

Culture Squad

텍스트로 텍스트 너머의 맥락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https://antiegg.kr/author/jeo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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